토론:긍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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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가 서쪽에 위치한 별당이다. 이 건물은 고려말 이헌이 처음 건립하여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하던 것을 농암이 중수하여 긍구당(肯構堂)이라 하였다고 한다. 긍구당 글씨는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이 썼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ㄴ’자형이다. 규모가 작고 꾸밈이 없어 단조롭지만 누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다. 원래 넓은 뒷뜰에는 담이 없어서 주변의 자연공간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별당 중에서도 매우 자유로운 배치형식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종택 서편에 자리하는 별당이다.

본래 영천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헌(李軒)이 1370년 경에 처음 세워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던 이현보가 중수한 후 ‘긍구당(肯構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물의 이름은 조상의 업적과 뜻을 오랫동안 이어받는다는 뜻이며, 현판의 글씨는 당시 명필로 유명했던 신잠(申潛, 1491-1554)이 썼다.

안동에서 태어난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며 자연을 노래하는 시조 등의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다.

건물은 ‘ㄴ’자형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한 보조 기둥 2개가 대각선으로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오른쪽의 마루가 앞쪽에 꾸며진 대청과 연결되도록 했다. 건물 앞쪽은 축대를 쌓고 보조 기둥을 세워 바닥을 높게 띄워 마루가 바깥으로 돌출되게 했으며, 낮은 난간을 시설해 누마루 형식으로 꾸몄으며, 건물 오른편의 쪽마루와 이어져 통행을 위한 역할을 겸한다.

본래 도산면 분천리의 산록이 이어진 곳에 담장 없이 세워져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도산면 운곡리로 옮겨졌고,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2007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지어졌다.

  •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 낡은 건물을 다시 고쳐 지었다. 현재 농암 종택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긍구당의 우측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반 칸의 퇴칸을 설치한 후 그 뒤에 마루를 꾸몄는데, 내부에는 감실을 꾸며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1차 수정

긍구당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가문의 종택에 속한 별당이다.

이 건물은 원래 영천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헌(李軒)이 고려 후기에 처음 세워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현보가 중수하였고,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이 낡은 건물을 다시 고쳐 지었다. 본래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고, 농암유적지를 정비하면서 2007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지었다. 현재 농암종택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종택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긍구당이라는 이름은 이현보가 『서경(書經)』의 한 구절에서 취해 지은 것으로,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길이길이 이어받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명필로 유명한 신잠(申潛, 1491~1554)이 썼다.

긍구당은 ‘ㄴ’자형의 건물로, 기단을 2단으로 높게 만든 후 건물 전면에는 누마루를 두고 뒤에는 온돌방과 마루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