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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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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9월 18일 (토) 02: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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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생가
이육사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육사 생가
한자 李陸史 生家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포도길 8 (태화동)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지정(등록)일 1973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이육사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14세손으로, 본명은 이원록(李源綠)이며 이후 이활(李活)로 개명하였다. 필명으로 쓴 이육사는 항일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혀있을 때의 수감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이다. 1925년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총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또한 여러 편의 저항시를 발표하며 항일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베이징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4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생가는 팔작지붕을 얹은 사랑채와 맞배지붕을 얹은 안채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지붕 형태만 다르고 크기와 구조가 똑같아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 대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1904-1944)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 의열단에 가입한 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여러 편의 저항시를 발표하며 항일 정신과 민족 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육사는 필명으로, 1927년 대구형무소에 갇혀있을 때의 수감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이다. 평생 총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고, 베이징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순국하였다.

생가는 팔작지붕을 얹은 사랑채와 맞배지붕을 얹은 안채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두 건물 사이에 대문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지붕 형태만 다르고 크기와 구조가 똑같아 대칭을 이룬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