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육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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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주택은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육사(陸史) 이활(李活, 1904~1944)의 생가이다. 그는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저항시인으로 유명하다.

이 주택은 홑처마에 ‘一’자 집으로 안채는 맞배지붕이고 사랑채는 팔작지붕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칸수가 같고 앞뒤로 ‘一’자형 건물이 평행으로 배치되어 서로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지붕이 맞닿아 있을 정도인데, 이 사이에 대문간을 만들었다. 안채는 부엌, 방,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방 3칸과 왼쪽에 부엌을 두었다.

이 집이 안동시내로 옮겨온 후에 한쪽 일각문(一角門) 자리에 대문을 내고 원래 대문은 없어졌다. 도산면 원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6년 이 곳으로 옮겼다. 원천리의 생가터에는 육사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주택은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육사(陸史) 이활(李活,1904~1944)의 생가이다.

이육사는 이황(李滉,1501~1570)의 14세손으로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활(活), 자는 태경(台卿)이다. 북경조선군관학교와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저항시를 발표하면서 항일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후 계속적인 항일 운동으로 수없이 옥고를 치르다가 북경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청포도(靑葡萄)」(문장,1939.8.),「절정(絶頂)」(문장,1940.1.)·「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등의 작품이 있으며 사후에 유고집 『육사 시집』(1946)이 발간되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원천동의 생가터에는 1993년 「청포도」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건물은 홑처마 집으로, 안채는 맞배지붕이고 사랑채는 팔작지붕이다. ‘ㅡ’자형 사랑채와 안채를 앞뒤로 평행으로 배치하고 두 건물 사이에 대문과 일각문(一角門, 대문간이 따로 없이 기둥을 양쪽에 세워 문짝을 단 문)을 세운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지붕형태만 다르고 간살이나 구성이 서로 똑같은 공간을 이루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부엌·방·대청·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방 3칸과 왼쪽에 부엌을 가설하였다.

1차 수정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14세손으로, 본명은 이원록(李源綠)이며 이후 이활(李活)로 개명하였다. 필명으로 쓴 이육사는 항일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혀있을 때의 수감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이다. 1925년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총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또한 여러 편의 저항시를 발표하며 항일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베이징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4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생가는 팔작지붕을 얹은 사랑채와 맞배지붕을 얹은 안채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지붕 형태만 다르고 크기와 구조가 똑같아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 대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