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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나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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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5월 24일 (월) 05:5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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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나원루
부나원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부나원루
한자 浮羅院樓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산84-1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지정(등록)일 1973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부나원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驛院)공영제도에 의하여 예안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다른 건물도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누각만 남아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부내에 27개의 원(院)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소멸되고 당시의 누각이 남아 있는 곳은 이 곳이 유일하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이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인 것으로 보아 16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건물로 윗부분은 대청이며 주위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누의 아래기둥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기둥이고 상부기둥은 원형기둥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5년에 이 곳으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고려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895년 근대 통신수단의 도입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역원(驛院) 제도에 의해 예안현에 소속되어 있던 ‘부나원(浮羅院)’의 누각이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긴급한 군사정보를 전달하며,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물자의 전송을 담당하던 교통통신기관이다. 정부 관리들이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행할 때, 이곳에서 숙박하거나 말을 빌려 탈 수도 있었다. 원은 대개 역과 역 사이에 공무로 출장 중인 관리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한국에서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인 5세기 경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역로망을 형성해 운영했다.

이 지역 지리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에는 27개의 원이 있었으며, 부라원은 원래 부포리 마을 앞 들판에 있었다고 한다. 원사(院舍) 등 여러 건물이 있었지만 다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판의 글씨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난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것이기 때문에 16세기 경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층은 대청마루로 꾸며져 있고,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왼편에 출입을 위한 사다리를 놓았다. 아래층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의 기둥을 쓰고, 위층은 원형으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1차 수정

부라원루는 역원(驛院) 제도에 따라 예안현에 설치되어 있던 부라원의 누각이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긴급한 군사정보를 전달하며,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물자의 전송을 담당하던 교통통신기관이고, 원은 공적인 임무로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공공 여관이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에는 27개의 원이 있었으며, 부라원은 원래 부포리 마을 앞 들판에 있었다고 한다. 부라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지만 다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는데,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판의 글씨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난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것이기 때문에 16세기 경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층은 대청마루로 꾸며져 있고,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왼편에 출입을 위한 사다리를 놓았다. 아래층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의 기둥을 쓰고, 위층은 원형으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부나원루 Place 부나원루
영가지 Record 영가지(永嘉誌)
한호 Actor 한호(韓濩,_1543-1605)
안동댐_건설 Event 안동댐_건설
역원_제도 Concept 역원_제도
예안현 Place 예안현
부나원 Place 부나원
부나원루_현판 Object 부나원루_현판

Links

부나원루||부나원루_현판||hasPart
Source Target Relation
부나원 부나원루 hasPart
영가지 부나원 documents
부나원루_현판 한호 calligrapher
부나원루 예안현 formerLocation
부나원루 안동댐_건설 isRelatedTo
부나원 역원_제도 isRelatedTo

참고자료

  • 부라원루,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08 → 부라원루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驛院) 제도에 따라 예안현(禮安縣)에 설치되었던 부라원역(浮羅院驛)의 누각이다. 조선시대에 역(驛)은 교통과 통신 업무를 담당했고, 대개 30리 즉 11.78㎞마다 하나씩 설치되었다. 원은 대개 역과 역 사이에 자리했는데 공무로 출장한 관리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라원은 원래 부포리 마을 앞 들판에 있었으나 원사(院舍)는 없어지고 누각만 남은 것을 1976년 1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기에 이르러 현 위치로 옮겼다.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부 관내에 27개의 원이 있었다고 하나 그 자취가 남은 곳은 부라원이 유일하다. 부라원루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판 글씨를 한석봉(韓石峯, 1543~1605)이 쓴 것으로 보아 16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중층 누각으로 누 밑의 기둥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이고 상층의 기둥은 원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상층부는 우물마루를 깐 통간 대청이며, 그 주위에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규모에 비해 칸살을 넓게 잡아 관아 건물로서 위엄을 보여준다. 기둥 위는 전혀 장식을 하지 않았고 장혀수장으로 처리하였다. 통상적으로 관아나 향교, 서원 등 권위 건축에서 누각은 익공, 또는 주심포 계열을 주로 사용하여 격식을 높이는데, 부라원루가 이런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것은 국가와 지방 경제가 어려웠던 임진왜란 직후에 건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5량 구조로 대들보 위에 종보를 올리고 종보 위에는 제형판대공에 첨차와 소로를 끼운 간략한 포대공으로 약간의 장식을 하였다. 측면 가운데 기둥 위에는 충량을 얹어 대랑 위에 걸었다. 충량 위에는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외기를 돌리고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 숨바꼭질 하듯 찾아가는 안동 부나원루, 선비 문화의 산실, 누정, 역사문화유산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332 → 부나원루는 조선 시대 예안현에 속했던 부라원에 지어진 건물이다.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안동부 관내에 27개의 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그 자취가 남은 곳은 부라원이 유일하다. 현재 부라원의 원사(院舍)는 없어졌지만 원루(院樓)가 남아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부라원이 있어 ‘부라리’로 불리는 마을은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이 있는 봉화 금씨 집성촌이었다.

  • [금정역지] 항목 참조 → ‘역원제도’ 설명 /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긴급한 군사정보를 전달하며,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물자의 전송을 담당하던 교통통신기관이다. 정부 관리들이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행할 때, 이곳에서 숙박하거나 말을 빌려 탈 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인 5세기 경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역로망을 형성하였다가, 1895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