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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각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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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산산성
각산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각산산성
한자 角山山城
주소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산40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
지정(등록)일 1983년 8월 6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관리자 사천시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각산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삼천포항 동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의 8부 능선에 있는 석성(石城)이다. 남해 바다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에 돌로 쌓은 성벽 242m 가량이 남아 있다.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605년에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이 축성한 것으로 전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진주가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음을 전하고, 일본서기(日本書紀)는 6세기 중엽에 백제가 섬진상을 건너 진주지역을 압박하고 있음을 전한다. 백제가 가야진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쌓았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왕조가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할 때도 이용되었고, 1350년[공민왕9]에 왜구가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각산 마을이 불탔을 때 지역의 인민들이 이 성에서 돌팔매[石戰]로 항전(抗戰)하기도 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삼천포항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형태의 각산(해발 398m)의 서쪽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이다. 성벽은 높이 3-4m, 둘레는 약 242m이다.

성의 남문터는 온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외의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199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남문터와 북문터 외에 별도의 건물지나 우물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성벽 일부가 2013년에 갑자기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했다. 성 안쪽에는 남해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1995년에 세운 목조 건물 1동이 있다. 이 건물은 2002년에 보수되었다.

각산산성은 백제의 30대 임금인 무왕(武王)이 이곳을 가야진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605년에 쌓았던 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가 1270년 몽골에 항복한 것에 반대했던 삼별초 세력과의 전투에서도 활용되었다. 삼별초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몽골과 고려 정부군의 연합에 대항하면서 경상도 해안의 중심 거점인 진주를 노렸으나, 이 성이 있어 진주로 넘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공민왕 9년(1350)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마을이 불에 타는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 돌팔매로 맞서 싸웠다고 전한다.

  • 각산 정상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남아있다. 각산 봉수는 삼별초 세력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처음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북쪽의 우산봉수대로 연결된다.
  • 고려 원종(재위1259∼1274) 때에 정상에 있는 봉화대를 만들면서 쌓았다는 견해도 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각산산성 Object 각산산성
사천_각산 Place 사천_각산
백제_무왕 Actor 백제_무왕(武王,_재위_600-641)
삼별초 Actor 삼별초
각산_봉수 Place 각산_봉수
고려사 Record 고려사(高麗史)
삼국사기 Record 삼국사기(三國史記)
L38-0095-0000 Heritage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_각산산성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각산산성 사천_각산 currentLocation
각산산성 각산_봉수 isNear
각산산성 백제_무왕 isRelatedTo
각산산성 삼별초 isRelatedTo
고려사 각산산성 documents
삼국사기 각산산성 documents
각산산성 L38-0095-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

  • 각산산성,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0950000&pageNo=1_1_1_1 →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각산의 정상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옛 모습대로 남아있고, 서쪽 등성이에 각산산성이 남아있다. 고려 원종(재위1259∼1274) 때에 성과 봉화대를 만들고, 줄항터에는 구라량영의 본거지를 두어 이곳을 지켰다. 고려 말에 사량도로 영을 옮기고 난 후, 이곳이 무방비상태로 되자 왜구가 침입하여 성에 불을 질르기도 했다. 그후 각산은 봉화대가 자리하는 곳이 되었으며, 봉수는 남쪽으로 대방산, 서쪽으로 곤양의 우산봉수, 북쪽으로 사천 안점봉수와 연결되었다.
  • 각산 산성(角山山城), 사천시사 제11편 문화재, 향토역사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http://jdpaper.ciclife.co.kr/sub.html?w=body_01_01&style=01&idx=951&num=3530&search=&_view=view → 산성의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어 ’91년도와 ’93년에 걸쳐 120.8m를, ’95년에 12.3m, ’96년에서 ’97년까지 31.9m, 그리고 2002년에 60m 등 225m의 성벽을 원상대로 복원하고 285m 중 잔여 60m가 남아있다. 아울러 산성에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의 하나로 시에서는 ’95년 4월 도비와 시비 등 1억5천만원의 사업비로 건평 6.8평 규모의 목조기와로 된 망루(望樓) 한 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건립된지 만 5년 밖에 되지 않은 이 망루는, 2000년 8월 31일 내습한 제12호 태풍 <파라피룬>의 영향으로 완파되고 말았다. 이에 사천시에서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해피해 복구비 지원을 경상남도에 요청함과 동시에 재건계획을 수립하여 사업비 1억2천3백만원을 투입, 2002년 5월에 완공하여 다시 제모습을 찾게 되었다.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25> 사천 각산산성, 대경일보, 2020.04.14. https://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663 → 각산산성은 현재 남문 터만 원형대로 남아 있고 성벽 대부분은 허물어져 복원한 상태다. 둘레 242m로 처음 축조 당시 남, 북 2개 성문만 낸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 남쪽 성벽은 한일(一)자로 길게 높이 쌓아 옛 산성다운 위엄과 면모를 보여준다. 남쪽 성벽은 끝 지점에서 반원형으로 길게 북쪽으로 휘감아 올라간다. 능선을 타고 올라가던 성벽은 북문 터로 이어진다. 성벽은 북문 터에서 다시 동쪽으로 휘감아 낮아지면서 남문 터로 이어진다. 산성 안 건물 터에는 새로 지은 누각이 남해안을 바라보고 서 있다. 편액이 없어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각이지만 외모가 장중하다. 각산 봉화대는 북문 터를 벗어나 산길 400여 m 더 가면 끝 지점 산정에 있다. 각산에는 2018년부터 봉화대~늑도동 초양도 2.2km를 잇는 해상케이블카가 운영 중이다. 케이블카 각산정류장에는 정남해안 전망대가 있다.
  • ‘붕괴 후 1년’ 각산산성 보수 들어가, 뉴스사천, 2014.3.6 http://www.news4000.com/news/articleView.html?idxno=16544 → 각산산성은 삼천포항 동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의 8부 능선에 있는 석성(石城)이다. 남해 바다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에 돌로 쌓은 성벽 242m 가량이 남아 있다.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던 것을 지난 1991년 복원했다.
  • 무너지고 부서져도…지자체, 문화재 보호 뒷짐, 국제신문, 2014.2.27.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40228.22010204504 → 27일 본지 취재진의 확인 결과, 사천시 대방동 각산 정상부근에 위치한 각산산성(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6호)은 전체 산성 242m 가운데 30여 m가 붕괴된 채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 산성은 지난해 이맘때쯤 훼손됐으나 1년 여가 지나도록 복구되지 않은 상태다. 또 이곳은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보수가 진행됐음에도 3번의 크고 작은 붕괴사고가 발생해 부실복구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산성 중앙에 있는 망루도 사정은 비슷하다. 난간이 군데군데 썩은 데다 손잡이 일부가 떨어져 나가 추락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지붕의 기와와 용골 일부도 내려앉았다. 해발 300여 m에 자리한 각산산성은 백제 30대 무왕(서기 605년)이 가야진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적 가치도 뛰어나다. 그러나 40도 가량의 급경사에 횡단방향으로 축조된 까닭에 성곽의 기초부분 지반이 약해 늘 붕괴 위험을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