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사천 각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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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삼천포항 동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의 8부 능선에 있는 석성(石城)이다. 남해 바다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에 돌로 쌓은 성벽 242m 가량이 남아 있다.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605년에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이 축성한 것으로 전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진주가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음을 전하고, 일본서기(日本書紀)는 6세기 중엽에 백제가 섬진상을 건너 진주지역을 압박하고 있음을 전한다. 백제가 가야진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쌓았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왕조가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할 때도 이용되었고, 1350년[공민왕9]에 왜구가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각산 마을이 불탔을 때 지역의 인민들이 이 성에서 돌팔매[石戰]로 항전(抗戰)하기도 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삼천포항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형태의 각산(해발 398m)의 서쪽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이다. 성벽은 높이 3-4m, 둘레는 약 242m이다.

성의 남문터는 온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외의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199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남문터와 북문터 외에 별도의 건물지나 우물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성벽 일부가 2013년에 갑자기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했다. 성 안쪽에는 남해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1995년에 세운 목조 건물 1동이 있다. 이 건물은 2002년에 보수되었다.

각산산성은 백제의 30대 임금인 무왕(武王)이 이곳을 가야진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605년에 쌓았던 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가 1270년 몽골에 항복한 것에 반대했던 삼별초 세력과의 전투에서도 활용되었다. 삼별초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몽골과 고려 정부군의 연합에 대항하면서 경상도 해안의 중심 거점인 진주를 노렸으나, 이 성이 있어 진주로 넘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공민왕 9년(1350)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마을이 불에 타는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 돌팔매로 맞서 싸웠다고 전한다.

  • 각산 정상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남아있다. 각산 봉수는 삼별초 세력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처음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북쪽의 우산봉수대로 연결된다.
  • 고려 원종(재위1259∼1274) 때에 정상에 있는 봉화대를 만들면서 쌓았다는 견해도 있다.

1차 수정

각산산성은 삼천포항 동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해발 412m)의 서남쪽 능선에 돌로 쌓은 성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삼천포 앞바다와 사천만 입구 등 남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282m 정도이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199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문은 동쪽과 남쪽에 하나씩 설치하였고, 남문 북쪽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성 내부의 목조 누각은 1995년에 세운 것으로 2002년에 보수되었다. 정상부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남아있다.

고려 공민왕 9년(1360) 왜구의 침략으로 마을이 불에 타는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마을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 돌팔매로 맞서 싸웠다고 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각산산성은 삼천포항 동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해발 412m)의 서남쪽 능선에 돌로 쌓은 성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삭제)삼천포 앞바다와 사천만 입구 등 남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282m 정도이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199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문은 동쪽과 남쪽에 하나씩 설치하였고, 남문 북쪽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성 내부의 목조 누각은 1995년에 세운 것으로 2002년에 보수되었다. 정상부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고려사(1451)』·『고려사절요(1452)』에 고려 공민왕 7년(1358) 3월 11일 “왜구가 각산수(角山戍)에 쳐들어와 배 3백여척을 불태우고 달아났다”라고 하였고, 공민왕 9년(1360) “사주(泗州) 각산에 왜구가 침입하자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 싸웠으며, 각산리 마을이 불탔다.”고 한다. 『진양지(1632)』에는 각산에 구라량의 영이 있어 수군만호가 관할하였는데 조선 세종 때 고성군 사량도로 옮겨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각산산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조선 전기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2차 수정

각산산성은 삼천포항 동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각산(해발 412m)의 서남쪽 능선에 돌로 쌓은 성이다. 삼천포 앞바다와 사천만 입구 등 남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쌓아 조선 전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둘레는 282m 정도이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는데, 199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성문은 동쪽과 남쪽에 하나씩 설치하였고, 남문 북쪽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성 내부의 목조 누각은 1995년에 세운 것으로 2002년에 보수되었다. 정상부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고려 공민왕 9년(1360) 왜구의 침략으로 마을이 불에 타는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마을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 돌팔매로 맞서 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