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제일교회
공주 제일교회 Jeil Church, G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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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공주 제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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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eil Church, Gongju |
한자 | 公州 第一敎會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봉황동 7-4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472호 |
지정(등록)일 | 2011년 6월 20일 |
분류 | 등록문화재/기타/종교시설 |
시대 | 일제강점기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공주 제일교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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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공주 제일교회는 1892년 미 감리회에서 스크랜튼(M.F.Scranton) 선교사를 한강 이남 지역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공주지역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으며, 1902년 초가 1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남부지역 최초의 감리교 교회로 창설되었다. 현 예배당은 1931년 건립되어 영명학원과 영아관을 운영하여 인재양성과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충청지역 감리교 선교의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쟁 당시 상당부분 파손되었지만 남아있는 벽체, 굴뚝 등을 그대로 보존하여 교회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특히 교회 벽면에는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개척자인 고 이남규 선생의 초기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전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공주 제일교회는 수원이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첫 감리교회이다.
1892년 미 감리회에서 공주를 충청도 선교 거점으로 확보하려는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스크랜톤(W. B. Scranton) 선교사가 수원·공주구역의 관리자로 임명되면서 공주지역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으며, 1898년 수원·공주구역 관리자로 임명받았던 스웨러(W. C. Swearer) 선교사가 1902년 초가 1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서 남부지역 최초의 감리교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어, 1903년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과 이용주 전도사가 와서 하리동(현 옥룡동)에 초가 2동을 구입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는데, 초가 하나는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또 다른 하나는 진료소 및 교육시설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맥길의 예배당이 지금 제일교회의 초시가 된다. 공주는 충청 지역의 선교 중심지였고, 그 중에서도 공주 제일교회는 선교 거점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이다. 유관순 열사와 조병옥 박사가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당시 이 교회를 다녔다.
문화재로 등록된 공주제일교회의 건물은 1931년 11월에 건립되었다. 6·25전쟁 때 예배당건물이 폭격으로 상당 부분 파손되었으나 건물의 벽제와 굴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1956년 파손된 부분만을 수리하여 교회 건물을 복원하였고, 1979년 증축하였다. 교회 벽면에는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개척자인 고 이남규 선생의 초기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전하고 있다.
지상 2층 붉은 벽돌의 예배당은 한국 초기 교회양식을 띠고 있어 근대 종교(기독교) 건축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처음부터 교회로 건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물은 공주제일교회(감리회)가 유일하다.
<이슬 정리본>
이 건물은 1931년에 준공된 공주 제일교회의 예배당으로 쓰였던 곳으로, 2018년부터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주제일교회는 수원 이남 지역에 처음 세워진 감리교회로, 의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과 이용주 전도사가 1903년에 하리동(현 옥룡동)에 초가 2채를 구입해 선교활동을 벌인 것이 시작이다.
초가 2칸으로 시작된 교회는 1909년 ‘협산자 예배당’을 지어 운영되다가, 1931년 신도들이 헌금을 모아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고 새롭게 세운 예배당이 지금의 박물관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의 폭격으로 크게 손상되었지만, 남아있던 건물의 벽과 굴뚝을 중심으로 1956년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여 복원하였으며, 이때 종탑을 정면 중앙으로 옮겼다.
붉은 벽돌을 이용해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의 정면은 고대의 성을 연상시키는 형태인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당한 역사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1979년에 다시 증축하면서 정면 종탑 부분 아래로 포치를 설치했고, 포치의 측면에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만들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개척자인 이남규(1931-1993)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 삼위일체의 신앙을 형상화한 것이다.
- 공주는 1896년 스크랜톤(W. B. Scranton) 선교사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충청 지역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
- 건물 주위에 있는 동상은 캐나다 출신의 샤프 선교사와 9대 목사로 부임했던 신홍식 목사의 것이다. 샤프 선교사는 1903년 한국으로 파견되었으며, 1900년부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사애리시[史愛理施, 미국 이름 Mrs. Alice H Sharp/Alice, J. Hammond]와 1905년에 결혼한 후 공주로 부임했고, 충청도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중 1906년 발진티부스에 걸려 순직했다. 사애리시는 1905년 공주 근대교육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명선여학교를 창설하였으며, 남편의 죽음으로 귀국했다가 1908년 다시 방한해 명선여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그녀는 1913년 충청남도 천안 지방 선교여행에서 12세의 유관순을 만나 수양딸로 삼고, 서울 이화학당으로 보내기 전까지 영명 학교에서 공부시켰다.
- 공주 제일 교회는 1919년 충청도 3.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신홍식 목사는 훗날 공주 제일 교회 9대 목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 '협산자 예배당'은 공주 제일 교회의 옛 이름으로서, ‘우산을 옆구리에 낀 사람의 예배당’이라는 뜻이다.1900년대 중반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 싶었으나 자금이 부족했던 신도들이 모여 기도를 올리는 자리에 우산을 낀 사람이 나타나 거액의 헌금을 했다. 희사자의 이름을 따 교회명을 짓는 관례에 따르려 했으나, 굳이 익명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산자 예배당’이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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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제일교회 | Place | 공주제일교회 | |
유관순 | Actor | 유관순(柳寬順_1902-1920) | |
조병옥 | Actor | 조병옥(趙炳玉_1894-1960)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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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제일교회 | 유관순 | isRelatedTo |
공주제일교회 | 조병옥 | isRelatedTo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주제일교회’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27190&cid=46647&categoryId=46647
- 두산백과 ‘공주제일교회’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41681&cid=40942&categoryId=37404
- 대한민국 구석구석 ‘공주제일교회’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806634&cid=42856&categoryId=42856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공주제일교회’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44134047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