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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묵와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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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묵와 고택
Mugwa House, Hapcheon
합천 묵와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묵와 고택
영문명칭 Mugwa House, Hapcheon
한자 陜川 默窩 古宅
주소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안성길 150-6 (화양리)
지정(등록)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206호
지정(등록)일 1984년 12월 2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5필지/2,021㎡
웹사이트 합천 묵와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고택은 조선 선조 때 선전관을 지낸 윤사성(尹思晟)이 지었다고 전하며, 윤사성의 10대손인 독립운동가 만송(晩松) 윤중수(尹中洙, 1891~1931)의 생가이기도 하다. 가야산에서 뻗어 내린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속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처음 지을 당시에는 집터가 600평에 달할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현재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경내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사당, 헛간 등의 건물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고, 남녀 생활공간과 동선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특히 사랑채의 높은 누각식 마루는 조선시대 양반 주택의 권위와 품격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기둥과 대들보 등 목부재의 견실한 맞춤과 세련된 형식은 조선 중기 양반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고 그 안쪽 마당 왼편에 높게 자리잡은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4칸 크기의 내루(內樓)가 돌출해 있고 중랑채가 그 동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랑채의 중문을 통해 안마당에 들어서면 높은 댓돌 위에 자리잡고 있는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내루 앞 부분은 합각(合閣)을 세운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ㄴ자형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서 대청이 6칸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다.

이 고가와 관련하여 영사재(永思齋)는 윤사성의 6대조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현재 전하고 있다. 일제시대 유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윤중수(尹中洙)도 이 집안의 인물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조선시대 문신 윤사성(1557-1619)이 지었다고 전하는 파평윤씨 집안의 종택이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독립운동가 윤중수(1891-1931)의 생가이기도 한 이 집의 이름은 가세를 확장한 윤사성의 현손 윤우(1784-1836, 호 묵와)의 호를 붙인 것이다.

가파른 경사지에 집을 짓기 위해 단을 두고 터를 닦아 건물들을 배치했다. 지금은 사랑채, 안채, 대문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사당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사랑채는 ‘T자형’의 평면 구조를 이룬다. 뒤쪽 건물에는 다락과 온돌방 2개, 마루방이 있고, 각 공간 앞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동쪽으로 치우친 자리에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돌출시켰다. 누마루는 서쪽만 개방하고 나머지 방향에는 창문을 설치한 판벽을 세웠으며, 두 공간의 지붕 모양을 다르게 처리했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한 단 높게 자리하고 있으며, 꺾어지는 부분을 포함해 대청이 넓게 조성되어 있고,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공간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툇마루를 전면에 달았으며, 건물 양 끝에 있는 부엌 두 곳에는 다락이 만들어져 있다.

안채 서쪽에 있는 사당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만들었으며, 협문을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이 집은 남녀의 생활 공간 및 제향 공간의 동선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집의 규모나 사용된 부재 등은 조선시대 양반 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윤사성은 선조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고 인조 때 영국원종 1등공신으로 봉작되었다.
  • 윤중수는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직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할 때 서명한 유림대표의 한 사람이었으며, 만주로 독립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 합천 묘산 묵와고가, 들꽃-문화재 다 모여라,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eng19&logNo=220954227738&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집 사진 상세(실제 답사)
  • [고택을 찾아서] 7. 합천 묘산 묵와고가, 부산일보, 2018.4.11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80411000233 -> 화양리는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 이 유서 깊은 집이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 인조 때 선전관을 지낸 윤사성에 의해서였다. 1650년께였다. 그 뒤로 4대에 걸쳐 증축됐다. 한때는 가세가 융성해 집의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고, 여덟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헛간채, 사당채 등이 남았다. -> 진한 글씨 정보 확인 필요함.(집이 지어진 시기로 언급한 1650년은 인물 생몰년과 안 맞음. 4대 걸쳐 증축한 이야기는 여기에서만 확인됨.)
  •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듯, 키 작은 굴뚝, 오마이뉴스, 2018.4.2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7830 -> 인조 때 윤사성이 지었다 하니 350년은 넘은 집이다. 윤사성의 현손, 묵와 윤우(1784-1836)에 이르러 가세가 번성하였다 한다. 고가 옆 육우당(六友堂)은 묵와의 여섯 아들의 뜻을 잇기 위해 후손이 건립한 제실로 묵와 이후 번창한 가세를 짐작케 한다. 묵와고가는 한창 때 600평대지에 집채만 여덟 채, 칸수는 100칸에 이르렀다. 지금은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중문채, 중문행랑채, 사당채만 남아 있다. 독립자금을 댄 것과 연관이 없지는 않을 터, 건국훈장애족장이나 겸손하게 대문에 달려 있는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 마을회관 앞에 있는 공적비로는 이 집안을 위로하기에 부족해 뵌다.
  • 한국의 전통 가옥 12 - 합천 묘산묵와고가(陜川 妙山默窩古家) (중요민속자료(206호) 기록화 보고서), 문화재청, 2006. -> 보수 실적 상세(1986년~2000년까지 10차례 보수됨.) / 건물 상세 설명 ; 가파른 구릉지에 위치한 고가는 마을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옥 전체를 따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남동향한 고가는 대지 북쪽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하고, 안채 전면에 T자형 사랑채와 곳간채를 두어 가옥의 중심을 이루게 했으며, 좌우에 부속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사랑채와 동측면의 곳간채와의 사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아궁이는 모두 3개가 조사되었는데, 굴뚝이 구조물로 축조되지 않고 기단 상부면에 접한 연도를 두어 연기가 바로 외부로 배출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