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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북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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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북장대
진주성 북장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성 북장대
한자 晉州城 北將臺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지정(등록)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시설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진주성 북장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북장대는 진주성의 북쪽을 담당하는 지휘 장대이다. 1618년(광해군10) 경상우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하고 수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 중기 군사 건물의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 진주성 북쪽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성 안과 성 밖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소이다.

마루 아래 기둥은 돌로 낮게 세웠고 누는 난간을 둘렀으며 군사 건물의 특성상 지붕이 낮게 설치되었다.

대(臺)의 이름은 북장대이고 누의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장대는 전쟁 또는 군사훈련 시에 대장이 성 안의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한 곳이다. 진주성에는 북장대와 서장대 두 곳이 남아 있다.

대(臺)의 이름은 북장대이고 누의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이다. 진주성 내성 북쪽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성 안팎을 살피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데에 효과적인 요새였다.

1584년에 진주 목사로 부임한 신점(1530-?)이 처음 세웠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러 소실되었던 것을 1618년에 남이흥(1576-1627)이 중건하였으며, 1864년에도 보수가 이루어졌던 것이 확인되었다.

누각에는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마루 아래에 돌기둥을 세웠다. ‘북장대’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쪽에는 출입을 위한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안쪽 현판에는 진남루(鎭南樓)로 되어 있으나,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장대로 불린다. 또한 내성의 북쪽 끝에서 내성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 모두를 지휘할 수 있어 공북루(拱北樓)라는 별칭이 생겼다.
  • 현 건물 세워진 시점 확인 필요 (안내판 사진 내용 참조 - 지금의 건물은 196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 기사 내용 참조시 - 1971년 북장대 중수)

참고 자료

  • 북장대,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jinju.grandculture.net/jinju/search/GC00401128?keyword=%EB%B6%81%EC%9E%A5%EB%8C%80&page=1 -> 기본 정보
  • 진주성 북장대, 여행은 행복이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1265370972 -> 현 건물 세워진 시점(안내판 사진 내용 참조 - 지금의 건물은 196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 (참고) 진주성 북장대 보수공사 중 1864년 상량문 발견, 뉴시스, 2020.6.23.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623_0001069643 -> 이번에 발견된 상량문은 1971년 북장대 중수시 문화재청 신영훈 위원의 중수기와 함께 발견돼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임시 보관 중이다.
  • 진주성 북장대, 왜 해체해야 했을까? 경남뉴스, 2020.7.8. https://www.gnnews24.kr/news/articleView.html?idxno=10633 -> 시에선 당초 북장대의 노후 기둥을 교체하기 위해 전면 해체를 결정했다. 그런데 해체 과정서 문화재청 자문단이 성벽의 초석 및 기단석 위치가 정확한지 고증을 추가로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자문단은 북장대 뒤편의 성벽과 북장대의 기초가 현재 맞물려 있어서 낡은 성벽이 무너지면 북장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진단하고, 지금의 북장대 위치가 정확한지를 다시 확인한 후 보수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