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서원(진안)
화산서원(진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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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화산서원(진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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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山書院(鎭安) |
주소 |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906 |
지정(등록) 종목 | 향토문화유산 제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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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화산서원은 장수 황씨 문중의 사당이다. 조선 전기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차남 황보신(黃保身)과 5대손 황징(黃澄) 등을 배향하고 있다.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970년에 중수되었다. 서원 부근에는 문중 인물인 황교찬(黃珓燦)의 효자각과 육씨 부인의 열녀각이 있다.
서원의 가장 안쪽 중앙에 사당이 있고, 사당 앞쪽 우측에는 강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앞쪽 3칸은 마루, 뒤쪽 3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정면에 ‘화산서원’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방에는 황희의 영정과 위패, 황보신과 황징의 위패 등이 모셔져 있다. 황희 영정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화산서원은 본래 장수 황씨 가문에서 황희(1363-1452)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922년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970년 중수되었다.
황희는 고려시대인 13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얻었으나,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1394년 태조의 요청으로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고, 이후 태종, 세종 대를 거쳐 1449년 은퇴하기까지 다양한 관직을 지냈다.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건물이 있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사당 안에는 황희의 영정과 위패를 비롯해 황희의 둘째 아들 황보신과 황희의 후손이자 진안 지역 입향조인 황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에 모셔져 있는 황희의 영정은 1474년에 그려진 것을 모사한 것으로, 상주의 옥동 서원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927년에 옮겨온 것이다.
- 황희 인물 설명 - 황방촌영정(2019 영문집필 항목) 참고
참고 자료
- 황징, 디지털진안문화대전 http://jin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jinan -> 황징은 원래 경상도 상주(尙州)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550년(명종 5)에 진안군 이북면 이곡리에 옮겨 살게 되는데 그것은 처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북면 이곡리는 현 안천면 삼거리 상리 지역이다.
- 화산서원, 디지털진안문화대전 http://jin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jinan -> 향사는 봄과 가을에 이루어지고 있다. 사당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9호인 「황방촌 영정(黃尨村影幀)」이 있다. 이 영정은 1474년(세종 6) 황희를 그린 초상이다. 원래는 경상북도 상주군 모동면 수봉리에 위치한 옥동 서원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상주의 황씨 종인(宗人)이 1844년에 복제하여 나누어 받아 화산 서원 관리인이 보관해 오다가 1927년 화산 서원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보관하게 되었다.
- 용담향교와 화산서원, 흐르는 물처럼...,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hjoo5504/221412590568 -> 서원 사진 확인
- 대한민국 구석구석 – 화산서원(진안)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6013&cid=42856&categoryId=42856 -> 화산서원에는 채용신(1850-1941) 화사가 모사한 황희 정승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그의 둘째아들 황보신과, 후손으로 입향조인 황징을 배향하고 있는 중배실 황씨 문중의 사당이다. 부근에 역시 황씨 집안의 인물인 황민찬의 효자각과 임진난 때 정절을 지킨 육씨 부인의 열녀각이 있다. 특기할 것은 1970년대 말까지도 이 서원에 딸린 하인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 화산서원과 정려각: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905, 일소일빈, 다음 블로그 http://m.blog.daum.net/thddudgh7/16566499 -> 이미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