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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 채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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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 채수 신도비
나재 채수 신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나재 채수 신도비
한자 懶齋 蔡壽 神道碑
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71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지정일 1998년 8월 3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나재 채수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나재 채수 신도비는 조선 전기의 선비 채수(1449~1515)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채수는 중종반정의 공을 인정받아 인천군 자리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함창에 쾌재정을 지어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상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도비로 역사적·서지학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비는 받침돌, 몸체,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체와 머릿돌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들었다. 받침돌은 강한 근육을 가지고 웅크린 채 머리를 들어 오른쪽 전면을 향한 해태 모양이며 몸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용이 새겨져 있다. 몸체는 대리석을 사각 기둥으로 다듬어 앞면과 뒷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제일 윗면에는 ‘인천채공신도비명병서’라고 새겼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오목하고 볼록하게 새겼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 전기의 선비 채수(1449-1515)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채수는 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워 직위를 받았지만,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던 상주로 낙향한 후 쾌재정을 짓고 독서와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비는 채수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516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남곤(1471-1527)이 지었고 홍언방이 비석의 제목을 썼다.

풍화가 심해 글자를 읽기 어렵고, 사선으로 절단된 흔적이 남아 있다.

상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도비로, 지금은 보호를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있다.

  • 비석 세워진 년도 : 금석문 탁본조사 보고서 내용 토대로 추정하여 작성함. -> 확인 필요
  • 채수는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인 『설공찬전』을 지었다. / 신도비 인근에 채수의 묘와 재실이 있다.
  • 받침돌과 대리석으로 된 몸돌과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은 해태의 형상을 하고 있고,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이 장식되어 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7085 -> 이미지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703060000&pageNo=1_1_1_1 -> 이 비는 조선 전기 중종반정 때의 공신인 나재 채수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채수(1449∼1515) 선생은 세조 14년(1468) 생원이 되고, 이듬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일을 맡아보았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폐비 윤씨를 옹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성종 16년(1485)에서야 다시 기용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4등 공신이 되어, 인천군에 봉하여졌다. 59세 때에는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지금의 상주)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머물며 남은 여생을 보내었다. 비는 약간 엉성하게 표현된 듯한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시대 전기 당시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상주 지역에 남아 있는 신도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 2015 금석문 탁본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 채수는 을해년(1515) 11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 3월 이이(1536-1584)가 장례를 치루었다. 장례를 지냈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하자 당시 이조참의 김안로金安老(1481-1537)가 채수의 행적을 남곤南흉1471 1 527)에게 가지고 와서 비명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 비문의 찬자는 남곤, 서자는 홍언방(?-?), 각자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