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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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최치원(崔致遠, 85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 6두품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학자이며, 문장가이다. 호는 고운(孤雲)이다.

사당의 이름은 그가 893년 부성군(현 서산)의 태수를 지냈던 인연으로 인해서 서산의 옛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 조선 선조 때 그의 덕망을 추모하던 유림들이 건립하였는데, 건립 초기에는 ‘도충사(道忠祠)’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07년 후손에 의해 재건되었다. 1913년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우로 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이름도 부성사라고 불렀다.

사우(祠宇)와 내·외삼문(內·外三門), 동·서재(東·西齋)로 구성되어 있다. 내삼문은 솟을대문 형식이고,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만들었으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고운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수정 국문

초고

부성사는 신라 말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을 기리는 사당이다. 부성은 서산의 옛 지명으로, 최치원은 893년 37살의 나이에 부성군 태수로 임명되어 이곳에 왔다. 그것을 기념하여 이름을 부성사라 하였다.

조선 선조 때(1567~1608)에 최치원의 덕망을 추모하던 이 지역의 유학자들이 후원하여 지었는데, 그때의 첫 이름은 도충사(道忠祠)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07년 경주 최씨 문중에서 재건하면서 최치원의 후손인 고려 후기의 충신 최청(崔淸, 1344~1414)의 영정도 함께 봉안하였다. 그 후 1913년 지금의 이곳으로 옮기고 이름을 부성사라 하였다. 이때 최청의 영정과 위패는 별도로 마련된 사당으로 옮겨갔다.

현재 부성사 건물은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양 옆으로 학문을 닦는 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다시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사당이 있는 구조이다. 외삼문은 가장 바깥의 문을 이르며,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인 내삼문을 따로 설치하여 정결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당에는 부성사(富城祠) 현판이 걸려있고 안에는 최치원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

문맥요소

요소 관계 설명
1 최치원(崔致遠) 모셔진 인물 857~?. 신라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
2 부성군(富城君) 이름의 연원 신라 시대 충청남도 서산시 일대를 관할하였던 군(郡)
3 도충사(道忠祠) 다른 이름 조선 선조 때(1567~1608) 세워진 부성사의 처 이름
4 경주 최씨 설립 단체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5 최청(崔淸) 함께 모셔졌던 인물 1344~1414. 최치원의 후손. 고려 말·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차 수정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을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서 18세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당의 관직을 지내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이에 좌절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유교의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선 선조(1567~1608 재위) 때, 최치원의 덕망을 추모하던 이 지역의 유학자들이 사당을 건립하고 도충사(道忠祠)라 이름 지었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07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사당을 재건하였고, 19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사당의 이름을 부성사라 하였다. 부성은 서산의 옛 이름으로, 최치원이 893년 부성군 태수로 임명되어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한 것이다.

현재 부성사는 외삼문, 동·서재,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최치원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자문의견

  1. 사적, 매장 위원1
    • 이곳은 → 부성사는
    • 최치원이 당의 빈공과에서 합격하였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음.
    • 서원철폐령 시기(19세기 말)를 1868년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음.
    • “부성은 서산의 옛 이름으로….” → 부성이라는 명칭이 최치원이 부성태수를 지낸 것을 기념한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음. 따라서 문장에 부성사의 사당 이름이 부성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이 드러나게 서술.
    • 유학자 → 유림(다른 문안의 용어와 통일 필요)
  2. 사적, 매장 위원2
    • 한자를 병기하지 않았음. 누락한 것인지 확인 필요. 또 처음 등장하는 “당나라”를 “당(唐)나라”와 같이 한자를 병기함이 좋을 듯함. 이 문제는 향후 모든 안내 자료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방안을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18세인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당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 부성은 서산의 옛 이름으로, 최치원이 893년 부성군 태수로 임명되어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2차 수정

부성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을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18세인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이에 좌절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유교의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선 선조(1567~1608 재위) 때, 최치원의 덕망을 추모하던 이 지역의 유학자들이 사당을 건립하고 도충사(道忠祠)라 이름 지었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07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사당을 재건하였고, 19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사당의 이름을 부성사라 하였다. 부성은 서산의 옛 이름으로, 최치원이 893년 부성군 태수로 임명되어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부성사는 외삼문, 동·서재,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최치원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