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흥향교 대성전
의흥향교 대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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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의흥향교 대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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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興鄕校 大成殿 |
주소 | 경북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 217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8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10월 15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향교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의흥향교 대성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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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고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세운 교육시설이며,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신 향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의흥향교는 1398년(태조 7) 의흥면 읍내동에 창건(創建)*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타고 있을 때 위패(位牌)*를 숨겨 위패는 온전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였고, 1614년(광해군 6)에 하리촌으로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 현 위치로 다시 옮겼으며 대성전은 이때 건립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5칸이다. 평면은 앞쪽에 기둥만 있는 반칸폭의 툇간(退間)*을 두고, 뒤편에 6칸 크기의 위패를 봉안(奉安)*하는 넓은 공간을 두었다. 둥근기둥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한 공포(栱包)*를 설치하였으나 세부수법은 앞, 뒷면 간에 차이를 두어 정면을 강조한 듯하다. 벽체는 출입문이 있는 전면을 제외하고 모두 가는 나무를 발처럼 엮은 바탕에 양쪽으로 흙을 바른 뒤 석회, 모래와 물을 적절히 배합해 얇게 바른 회사벽이다. 출입문은 두 짝 판자로 만든 널문이다. 지붕 골격을 이루는 뼈대는 둥근 모양의 도리가 5개인 5량가이다. 보 위에는 여러 장의 판재를 겹치고 연꽃과 연잎을 초각한 파련대공으로 도리를 받쳤다. 실내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기둥머리 밑으로는 무늬 없이 바탕색만 칠해져 있고, 그 이상은 부재의 끝부분에 여러 색으로 칠해 장식했다.
- 창건(創建) : 건물을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듦
- 위패(位牌) : 단(壇), 묘(廟), 원(院), 절 따위에 모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 툇간(退間) : 건물의 앞이나 뒤로 반칸정도로 확장한 공간. 주로 앞은 툇마루, 뒤는 반침을 두어 책장 등으로 사용됨
- 봉안(奉安) : 불상,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심
- 공포(栱包) :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주두, 소로, 첨차, 제공, 한대, 살미 등의 부재를 짜넣은 것
- 연등천장 :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대성전은 향교에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역 학생들에게 유교를 가르쳤다.
의흥향교는 1398년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에 타 1601년 중건하였다. 1641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대성전 건물을 세웠고,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이곳의 위패들은 향교가 세워졌을 당시에 안치했던 위패를 그대로 모신 것으로,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선암산의 바위굴에 8년 동안 피난시켰다가 다시 봉안하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 군위문화원 http://gunwicc.kr/gwcc/board.php?bo_table=cultural&wr_id=8&page=1&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 임진왜란 당시 돈암 손기남(豚岩 孫起南)선생이 선암산(船岩山)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시다가 1601년 10월 5일 현 위치에 위패를 모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도내에서 유일하게 당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경북의 재발견 - 57. 군위 의흥향교, 경북일보, 2010.2.1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623&sc_serial_code=SRN220 -> 중수 관련 이력들 확인 가능 (1601년(선조 34)에 중건했다. 그 뒤 1614년(광해군 6)에 하리촌(下里村)으로 옮겼다가 1641년(인조 19) 현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성전은 1957년·1968년·1977년에 각각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6, 7명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