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송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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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서원은 1829년에 세워진 것으로 고은 이지활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올렸다. 이지활은 호는 고은, 시호는 문정이며, 14세에 사마시 합격 이후 지방관을 지내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박유산에서 통곡하다 세상을 떠났다. 사후 1894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32년에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한남군 이어와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송계 이지번의 위패를 모셨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어내었으며, 1915년부터는 단을 설치하여 제향을 올렸다. 그 후 1936년 서원을 다시 짓고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경앙사, 신문인 승사문, 강당, 동서재인 집의재와 거경재 정문인 정용문 등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전기의 문신 이지활(李智活, 1434~?)의 절의를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30년(순조 30) 세운 서원이다. 1832년에는 세종의 서자 한남군 이어(漢南郡 李𤥽, ?~1459)와 이지활의 손자 송계 이지번(松溪 李之蕃, 1469~1522)을 함께 모셨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지활의 본관은 성주, 호는 고은(孤隱)이다. 세 아들과 함께 성주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백전면 양백리에 정착했다. 운봉현 감무(監務)로 나갔다가 1455년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 박유산(朴儒山)으로 은거했다. 이어는 세종의 넷째 서자로 1455년 세종의 6남 금성대군과 단종복위를 꾀했다는 죄로 금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양(咸陽)으로 이배되었다가 1459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 이지번은 이지활의 손자로 성종 때 무장현강, 수안군수를 지냈으나 연산군의 폭정이 일자 함양으로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송호서원은 1869년(고종 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7년 지역 유림의 뜻으로 중건되었다.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공간인 경앙사(景仰祠)를 뒤에 두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1차 수정

송호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지활(李智活, 1434~?)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30년에 세운 서원이다. 1832년에는 세종의 서자 한남군 이어(漢南郡 李𤥽, 1429~1459)와 이지활의 손자 이지번(李之蕃, 1469~1522)을 함께 모셨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지활은 세 아들과 함께 성주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백전면 양백리에 정착했다. 지방관을 지내던 중 1455년 세조(1455~1468 재위)가 단종(1452~1455 재위)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에 은거했다. 이어는 세종의 넷째 서자로 1455년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죄로 금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459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 이지번은 성종(1469~1494 재위) 때 지방관을 지냈으나 연산군(1494~1506 재위)의 폭정이 일자 함양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했다.

송호서원은 1869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7년 지역 유림의 뜻으로 중건되었다.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공간을 뒤에 두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1869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 1869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혹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에 철거되었다가
      • 수정이유: 원래 구절대로라면 서원철폐령도 1869년에 있었던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1868년에 있었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1832년에는 세종의 서자 한남군 이어~”→“1832년에는 세종의 왕자 한남군 이어~”
    • “이어는 세종의 넷째 서자로”→“이어는 세종의 12번째 왕자로”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유배지를 옮겼다가 1459년 유배지에서(->그곳에서)

2차 수정

송호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지활(李智活, 1434~?)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30년에 세운 서원이다. 1832년에는 세종의 왕자 한남군 이어(漢南郡 李𤥽, 1429~1459)와 이지활의 손자 이지번(李之蕃, 1469~1522)을 함께 모셨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지활은 세 아들과 함께 성주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백전면 양백리에 정착했다. 지방관을 지내던 중 1455년 세조(1455~1468 재위)가 단종(1452~1455 재위)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에 은거했다. 이어는 세종의 12번째 왕자로 1455년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죄로 금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459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지번은 성종(1469~1494 재위) 때 지방관을 지냈으나 연산군(1494~1506 재위)의 폭정이 일자 함양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했다.

송호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에 철거되었다가 1937년 지역 유림의 뜻으로 중건되었다.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공간을 뒤에 두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