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교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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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교수정은 고려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이 1398년에 건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조승숙의 본관은 함안이며, 1381년(우왕 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갔다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을 위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그 후 성종이 이 사실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수양명월율리청풍’이라는 글귀를 뽑아 자연암반 위에 새기고 거북거리를 조각하여 비를 세웠다. 비는 정자의 담 밖에 있으며 높이 320cm, 폭 90cm, 두께 39cm이다. 비의 대면에는 ‘입덕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정자 밑 동쪽에는 조씨 5효자의 정려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398년(태조 7)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조선이 개국하자 절의를 지키려는 고려 신하 72명이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거나 낙향했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조승숙의 본관은 함안이고, 함양 출신으로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했다. 1391년(공양왕 3) 부여의 감무(監務)로 있다가 이듬해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이후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와 교유하며 만년을 보냈다.

1870년(고종 7) 후손들이 옛 터에 교수정을 중건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 8자를 새겼다. 이는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이 성종의 명을 받고 지은 제문에 있는 글로 조승숙을 수양산으로 숨은 백이·숙제와 율리(栗里)에 은거한 도연명에 비긴 것이다. 교수정에 걸어놓은 ‘薇菊(미국)’이라는 글씨, 즉 고사리와 국화도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

교수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전면과 우측면 1칸에는 마루를 깔고 나머지 칸에는 방을 두었다. 정자 네 면에는 까치다리 모양의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1차 수정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398년에 지은 정자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는 72명의 신하가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에 은거하거나 낙향했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조승숙은 함양 출신으로 1377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다.

1870년에는 후손들이 교수정을 중건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 8자를 새겼다. 이는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이 성종의 명을 받고 지은 제문에 있는 글로 조승숙을 수양산으로 숨은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율리에 은거한 도연명(陶淵明, 365~427)에 비긴 것이다. 교수정에 걸어놓은 ‘미국(薇菊)’이라는 글씨, 즉 고사리와 국화도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팔작지붕으로 누각 하부에 낮은 기둥과 상부에 기둥을 세워서 건물 내부는 방과 계자난간을 두른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 건축물 서술이 부족하여 내용 첨가함.
  2. 분야별 자문위원 2
    •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398년에 지은 정자이다. ->후진 양성을 위해 1398년에 지은 정자이다. 로 수정
    • 72명의 신하가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에 은거하거나 낙향했는데 ->72명의 신하가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에 은거하거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로 수정
    • 도연명(陶淵明, 365~427)에 비긴 것이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에 비유한 것이다. 로 수정
    • ‘미국(薇菊)’이라는 글씨, 즉 고사리와 국화도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 --> 고사리와 국화를 말하는 ‘미국(薇菊)’이라는 글씨는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 으로 수정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는 72명의 신하가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에 은거하거나 낙향했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는데, 조승숙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 조승숙을 수양산에 숨은 백이(伯夷)·숙제(叔齊)와

2차 수정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398년에 지은 정자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는 72명의 신하가 황해도 개풍의 두문동에 은거하거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조승숙은 함양 출신으로 1377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다.

1870년에는 후손들이 교수정을 중건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 8자를 새겼다. 이는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이 성종의 명을 받고 지은 제문에 있는 글로 조승숙을 수양산으로 숨은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율리에 은거한 도연명(陶淵明, 365~427)에 비유한 것이다. 교수정에 걸어놓은 ‘미국(薇菊)’이라는 글씨, 즉 고사리와 국화도 이들의 절개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