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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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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18일 (목) 09: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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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흥교당
영덕 흥교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덕 흥교당
한자 盈德 興敎堂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도곡길 41-21 (축산면)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7호
지정(등록)일 2014년 12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주거시설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棟⁄48㎡
웹사이트 영덕 흥교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흥교당은 1688년(숙종 14) 건립된 건물이다. 1868년(고종 5) 박선(朴璿, 1596년~1669년, 호: 도와)과 권경(權璟, 1604~1666, 호: 대은)을 배향했던 도계정사(陶溪精祠)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그 신위를 모신 건물이다.

박선은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넷째 아들이며 장현광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관직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권경은 안동권씨 가운데 영덕에 처음 들어온 시조인 권책(權策)의 6세손이다. 평소 고매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알려졌다.

흥교당은 흙으로 담장을 둘렀고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1차 수정

흥교당은 1688년 건립된 건물이다. 박선(朴璿, 1596년~1669년)과 권경(權璟, 1604~1666)을 배향했던 도계정사(陶溪精祠)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이곳에 그 신위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박선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관직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권경은 안동권씨 가운데 영덕에 처음 들어온 시조인 권책(權策)의 6세손이다. 평소 고매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알려졌다.

흥교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흙으로 두른 담장이 2004년 태풍으로 붕괴되어 보수하였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흥교당은 주위에 방형에 가까운 흙과 돌을 이용한 토석담장을 둘렀고 우측 담장에 정문이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온돌방에는 반칸 정도의 감실을 두었다.
    •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흙으로 두른 담장이 2004년 태풍으로 붕괴되어 보수하였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흥교당은 박선(朴璿, 1596년~1669년)과 권경(權璟, 1604~1666)을 배향하던 도계정사(陶溪精祠)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신위를 옮겨 모시기 위해 지었다. 박선은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권경은 인품이 높은 선비로 알려졌다.
    • 흥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중앙의 2칸 대청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측면을 분할하는 기둥을 중간에 설치했으면서도, 전면에 별도로 퇴칸을 두어 민가의 일반 건물과 다른 특색을 보인다. 퇴와 대청 사이에 분합문을 설치하였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이곳에 그 신위를(이곳에 그 신위를 -> 그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 모시기 시작하였다.

2차 수정

흥교당은 1688년에 건립되어 박선(朴璿, 1596년~1669년)과 권경(權璟, 1604~1666)을 배향하던 도계정사(陶溪精祠)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신위를 옮겨 모시기 위해 지었다. 박선은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권경은 인품이 높은 선비로 알려졌다.

흥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건물 주위에 흙과 돌로 쌓은 담장을 둘렀고 우측 담장에 정문이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툇마루와 대청 사이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여, 민가의 일반 건물과는 다른 특색을 보인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