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관
해설문
국문
수원부의 객사(客舍)로, 정청을 우화관이라고 했다. 정청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절을 올렸다. 정청 좌우에 익사(翼舍)를 두어 수원을 들르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우화관은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동헌인 장남헌 북쪽에 남향해서 지었다. 우화관이라는 명칭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그 뜻을 두고 ‘봉인이 이를 축원함이다(封人之祝)’라고 밝혔는데, 이는 먼 옛날 화(華)라는 곳의 봉인 즉 나라를 지키는 관리가 요(堯)임금을 송축한 일을 말한다. 화성이 예의가 바로 섰던 옛날을 되새기는 곳이 되기를 바라던 정조의 뜻을 건물 이름에서 읽을 수 있다.
정청은 정면 3칸이며 동익사가 4칸, 서익사가 3칸이다. 정청 바닥은 전돌을 깔아 의례를 치르기에 알맞게 꾸미고 지붕을 좌우 익사보다 한 단 높였다. 정청 부분의 지붕을 한 단 높이고 좌우에 낮은 지붕이 대칭으로 서도록 하는 것은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행궁의 주요 건물이 대부분 동향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화관은 북쪽에 앉아 남향을 했는데, 이는 임금이 계시는 북쪽 방향에 전패를 모시기 위해서이다. 20세기에 들어와 객사의 기능이 사라진 후에 우화관 자리에는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가 지난 2013년 학교가 광교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객사는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연혁 - 1789년(정조13) 건립 / 1920년대 철거
- 규모 - 정청 9칸, 동익사 서익사
- 구조 - 목조 단층 익공식 맞배지붕(정청), 팔작지붕(좌우 익사)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우화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절을 올리거나, 외부에서 온 관리들이 숙소로 이용하던 건물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관아에 모셔진 전패는 지방에 대한 왕권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일자로 긴 형태인 우화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중앙의 정청에는 전패를 모시고 유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절을 올렸다. 의례를 치르기에 알맞도록 정청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지붕은 좌우 익사보다 높게 올렸다. 좌우 익사에는 외부에서 온 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온돌방과 각종 행사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청이 있다.
행궁의 주요 건물들이 대부분 동쪽을 향해 지어진 것과는 달리 우화관은 남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임금이 계시는 북쪽 방향으로 전패를 모시기 위해서이다.
수원시의 장관이 서울에 있는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중앙의 지붕이 한 단 높은 부분 실내에 왕을 상징하는 글자판을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15일에 절을 올렸다. 이것은 지방 장관이 국왕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건물 좌우의 지붕이 한 단 낮은 날개집에는 다른 곳에서 수원을 들른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로 이용했다. 왼편(동쪽) 날개집이 오른쪽(서쪽) 날개집보다 격이 높았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왼편을 오른편보다 우위에 두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