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루
해설문
국문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긴 1789년(정조13)에 수원읍의 동헌을 비롯한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옛 수원읍 정문 명칭을 따라서 진남루(鎭南樓)로 했다가 1795년(정조19) 행궁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거행할 즈음에 행궁의 여러 건물 이름을 고치면서 문도 신풍루로 했다. 신풍루란 이름은 정조가 직접 지은 것으로, 중국 한나라 시조인 유방의 고향 풍패(豐沛)를 지칭하는 말이다. 화성에는 신풍루 외에도 중양문이나 낙남헌 등 한나라에서 따온 건물 이름이 있으며 이런 이름들을 통해 화성에서 한나라의 자취를 이끌어 내려던 정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신풍루 건물은 중층의 누각식이며 아래층 3칸에 큰 널빤지 문 2짝씩을 냈다. 상층은 군사들이 올라가 주변을 감시하고 큰 북을 놓아 문 주변에서 행사가 있을 때 나가가고 물러나는 신호를 하고 또 시각을 알리는 역할도 하도록 했다. 문루 양 옆으로는 행랑이 이어지고 남북 양 끝에는 군영이 자리 잡고 있다. 신풍루의 건물 규모나 격식은 다른 지방도시 관청 출입문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문루 양옆으로 행랑이 이어지고 군영이 좌우에 버티고 있는 것은 드문 모습이다. 좌우 행랑과 군영은 이곳이 단순한 관청이 아니고 행궁의 출입문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혜경궁의 회갑연이 있을 때는 이 문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였다. 이 때 왕은 직접 신풍루에 임어하여 쌀 나누어 주는 행사를 지켜보았다. 1810년(순조10)에는 순조가 화성에 내려와 제사를 마치고 나서 역시 신풍루에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사미 행사를 거행했으며 이 때도 왕은 신풍루 문루 위에 올라가 행사를 지켜보았다. 신풍루는 20세기에 들어와 행궁이 도립병원으로 사용되면서 철거되었다가 지난 2002년 행궁 복원과 함께 다시 세워졌다.
- 연혁 - 1789년(정조13) 건립 / 2002년 복원
- 구조 - 중층 문루 겹처마 팔작지붕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수원 관청의 정문이다. 조선시대 관청의 정문은 앞에 붉은 칠을 한 나무 기둥 두 개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문(홍살문)을 두고 그 안쪽에 2층의 누각을 세우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형식을 따랐다. 문 좌우에 행랑을 두고 양 끝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시설을 배치해서 왕이 머무는 기간에 대비했다. 문 이름은 중국 한나라의 첫 번째 황제의 고향 명칭에서 따 왔다. 이름을 지은 정조 임금은 한나라를 왕의 위상이 바로 선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하고 화성에 한나라를 연상하는 건물 이름을 여럿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