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청원루
안동 청원루 Cheongwollu Pavilion, Andong |
|
대표명칭 | 안동 청원루 |
---|---|
영문명칭 | Cheongwollu Pavilion, Andong |
한자 | 安東 淸遠樓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2050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12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안동 청원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후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의 강화를 반대한 척화론(斥和論)의 거두인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인조 21년(1643)에 중건하였다.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에서 청원루라는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본래는 2채의 건물이 41칸의 규모였으나 1934년 홍수로 무너지고 1채만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평양부의 서윤(庶尹)을 지내던 시절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1520년경 경상도 안동에 지은 집이다. 이후 1618년경에 김번의 증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이 집을 중건하여 누각으로 만들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에는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1차 수정
이 건물은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1520년경에 지은 집이다. 이후 1618년경에 김번의 증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이 집을 중건하여 누각으로 만들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에는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김번(金璠) | 인물 | 김번(金璠) | 1479-1544. 조선 중기의 문신.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 직장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 12대손이고, 김상헌의 증조부가 된다. |
청원루(淸遠樓) | 문화유산 | 청원루(淸遠樓)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번지 |
김상헌(金尙憲) | 인물 | 김상헌(金尙憲) | 1570년-1652년. 조선후기 문신. 1590년(선조 23) 진사에 합격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예조 판서를 지냈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
병자호란 | 사건 | 병자호란 | |
주돈이 | 인물 | 주돈이 | |
애련설 | 작품 | 애련설 | |
소현세자 | 인물 | 소현세자 | |
경기도 남양주시 석실마을 |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석실마을 | 김상헌이 은거한 곳이고 그와 그의 형 김상용을 배향한 석실서원이 있다. |
김수증 | 인물 | 김수증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
청원루 | 김번 | ~의 집이다. |
청원루 | 김상헌 | ~이 중건하였다. |
청원루 | 애련설 | ~와 관계가 있다. |
청원루 | 김상헌 | ~의 누정이다. |
김번 | 김상헌 | ~의 증조부이다. |
김상헌 | 김번 | ~의 증손자이다. |
김수증 | 김상헌 | ~의 손자이다. |
안동 | 김상헌 | ~의 본관이다. |
남양주 석실 | 김상헌 | ~에 은거하다. |
참고자료
- 황만기,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국학연구』 20, 한국국학진흥원, 2012.
- 「2019년도 문화재 위원회 제13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 『淸陰集』 「年譜」.
- 『谷雲集』 권3, 「丙丁避亂事實」; 권4, 「花山記」.
→ 위의 자료들을 통해 청원루의 최초 건립시기(1520년경)와 중건시기(1618년경)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문집인 『淸陰集』 「年譜」와 그의 손자 김수증의 『谷雲集』을 통해 그가 언제 안동의 소산에 거주했었는지를 확인 할 수 있다. 기존 국문과 민족문화백과사전,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중건시기를 김상헌이 청에 인질로 붙잡혀 갔다 온 이후인 1645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가 국내로 돌아온 이후에는 안동에 거주하지 않고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그가 안동에 있던 시기는 1618년-1621년, 1637년-1640년 사이인데 1637년에 이미 지어진 청원루에서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전 시기인 1618-1621년 사이에 중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청원루의 이름과 관련하여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의미’라는 설이 있는데 황만기의 연구에서 사실이 아님을 자세히 논증하였다.
- 『국조인물고』 권26 「명류(名流)」 → 김번이 안동김씨 12대손이고 김상헌이 그의 증손으로 15대손임을 확인할 수 있다.
- 청원루,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B2%AD%EC%9B%90%EB%A3%A8&ridx=0&tot=273
- 김상헌,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9%80%EC%83%81%ED%97%8C&ridx=0&tot=44
- 청원루,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 보물 제2050호 안동 청원루 (安東 淸遠樓),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1_1_0&ccbaCpno=1123720500000
- 김번(金璠),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