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청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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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후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의 강화를 반대한 척화론(斥和論)의 거두인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인조 21년(1643)에 중건하였다.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에서 청원루라는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본래는 2채의 건물이 41칸의 규모였으나 1934년 홍수로 무너지고 1채만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평양부의 서윤(庶尹)을 지내던 시절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1520년경 경상도 안동에 지은 집이다. 이후 1618년경에 김번의 증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이 집을 중건하여 누각으로 만들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에는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1차 수정

이 건물은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1520년경에 지은 집이다. 이후 1618년경에 김번의 증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이 집을 중건하여 누각으로 만들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에는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