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지
경주 황룡사지 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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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황룡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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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 |
한자 | 慶州 皇龍寺址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2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6호 |
지정(등록)일 | 1963년 1월 2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
시대 | 신라 |
수량/면적 | 390,418㎡ |
웹사이트 | 경주 황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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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황룡사는 경주 중심부에 위치한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북쪽에 궁궐을 조성하다가 황룡이 나타나 사찰로 고쳐지었다. 그 후 장육존상을 봉안하기 위한 금당을 다시 짓고,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에 구층목탑을 건립하기까지 93년에 걸친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완성된 사찰이다.
황룡사는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놓이고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 탑 좌우에 경루와 종루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주위 사방을 회랑으로 둘렀다. 금당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조성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보낸 황철과 황금으로 만든 금동삼존불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새로 지어졌다. 또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이 신라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 거대한 구층탑을 세워 외적 침입을 막자는 건의에 따라 백제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불러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완공하였다. 경덕왕대(742~765) 재위에는 황룡사 대종이 완성되었다. 구층목탑은 낙뢰(落雷)같은 사고가 있을 때마다 고쳐지어졌지만,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 침입 때 황룡사와 함께 소실되었다.
신라삼보(新羅三寶)* 가운데 두 개가 황룡사에 있을 만큼 황룡사는 신라를 상징하는 큰 사찰이었다. 관리 관부인 성전(成典)*을 설치하여 국가관리 사찰로, 호국사찰로 위상이 높았다.
1976년부터 8년간의 발굴조사 결과, 원래 늪지대를 메워 절터를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4만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높이 182cm의 대형 치미는 황룡사 건축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 신라삼보(新羅三寶): 신라 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허리띠), 진흥왕대의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 1장6척 크기의 불상), 선덕여왕대의 황룡사 구층목탑
- 성전(成典): 신라시대 왕실의 사원을 관리하는 관청의 명칭.
- 치미(鴟尾):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신라시대에 경주 중심부에 창건된 황룡사의 옛 터이다.
황룡사는 553년 궁궐을 조성하던 곳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금동삼존불을 봉안하기 위한 금당을 짓고, 645년 9층 목탑을 세우기까지 93년에 걸친 대규모의 국가사업으로 완성된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황룡사는 처음에는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놓여있었다. 이후 장육존상과 목탑을 조성하면서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들이 더 지어졌고, 탑 좌우에 경루와 종루가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두른 가람 배치를 보인다.
그러나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진 후로 재건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있게 되었다.
1976년부터 8년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늪지대를 메워 절터를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도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에 이르며, 높이 182cm의 대형 치미는 황룡사 건축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두 가지인 9층 목탑과 장육존상이 있었던 황룡사는 국왕이 직접 참석하는 법회를 주관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가진 호국사찰이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