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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양세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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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양세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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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양세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송씨양세정려
영문명칭 0
한자 宋氏兩世旌閭
주소 대전 중구 대사동 127-2번지
지정(등록)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3호
지정(등록)일 2000년 2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
웹사이트 송씨양세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송씨양세정려는 조선 후기 회덕 지역에 살았던 송기학(宋基學)의 아내 윤씨 부인(尹氏夫人)과 그의 손자 송두원(宋斗源)에게 내려진 정려이다. 명정(命旌) 현판이 보관된 정려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의 작은 규모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구조이며 주택가 내에 있다. 이 정려는 중간에 화재로 폐허가 되었으나, 고종 4년(1900)에 후손들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윤씨 부인은 호조참판을 지낸 윤비경(尹飛卿)의 딸로, 송시열(宋時烈)의 조카인 송기학에게 출가하였다. 윤씨 부인의 친정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빈소를 지키던 중 불이 났다고 한다. 이때 친정어머니인 한산 이씨가 빈소를 지키던 남편과 시어머니의 시신을 구하였지만 자신은 죽고 말았다. 모친의 소식을 들은 윤씨 부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가 33세 나이로 죽었다. 윤씨 부인의 손자인 송두원은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정성을 다하여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조선 영조 18년(1742)에 정려가 내려졌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후기 효성으로 이름났던 송두원과 그의 할머니 윤씨 부인의 정려이다.

송두원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해 음식을 철에 맞추어 손수 맛을 본 후에 올리고 부모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하여 드렸다고 하며, 부모상을 당하자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시묘 중 잠시도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윤씨 부인은 송두원의 조부인 송기학과 혼인하였다. 1665년 돌아가신 친정 할머니의 빈소에서 불이 나자 그녀의 어머니는 할머니의 시신과 빈소를 지키던 남편을 구해내고 자신은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윤씨는 식음을 전폐한 채 슬퍼하다가 33살의 나이로 죽었다.

두 사람의 효행을 인정하여 1745년 영조가 정려를 내렸으며, 현재 일반주택가에 있는 정려각에 모셔져 있다.

  • 송두원은 우암 송시열의 조카인 송기학의 손자이다. 시묘살이 중 산소에 흰제비가 날아와 둥지를 틀고 살았는데 사람들이 그의 정성이 하늘에까지 닿은 것이라 하였다.
  • 정려는 화재가 났던 것을 1900년에 후손들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