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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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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3월 21일 (토) 00: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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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휘신도비
Stele of Kim Gye-hwi
"김계휘 신도비", 디지털논산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김계휘신도비
영문명칭 Stele of Kim Gye-hwi
한자 金繼輝神道碑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13-1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지정(등록)일 1984년 7월 26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김계휘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도비란 조선시대 정2품 이상 관직을 지낸 사람의 평생 동안의 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이 비는 조선시대 문신 김계휘의 신도비로, 원래 마을 안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긴 것이다. 김계휘(1526-1582년)는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황강(黃岡)이다. 좌의정 김국광의 현손이며, 현감 김호(金鎬)의 아들로 명종 4년(1549)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문원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명종 12년(1557)에 파직 당하자 낙향하여 연산에 정회당(靜會堂)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으며, 사후(死後)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비는 높이 187cm, 너비 86cm의 대리석 재질이며, 반원의 운룡문(雲龍紋) 이수(螭首)를 올린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높은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다. 쌍용이 여의주를 물고 다투는 형상의 이수는 조선중기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비신에는 사면에 글씨를 새겼으나 닳아서 알아보기는 힘들다. 비문은 최립(崔岦)이 지었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를 썼으며, 손자인 김집(金集)이 서(書)하였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에서 조선중기 비(碑)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문과방목 자료에 따르면, 장원급제가 아니라 3위임.

- 참고: "김계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영문

Stele of Kim Gye-hwi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김계휘(1526-1582)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김계휘는 논산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고, 문장을 짓는 재주가 남달랐다. 154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1557년에는 고향에 정회당이라는 강학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김계휘의 아들은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이다.

김계휘의 신도비는 1604년에 세워졌다. 네모난 받침돌, 몸돌, 반원형의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머릿돌에는 쌍룡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였던 최립(1539-1612)이 지었고, 김계휘의 손자인 김집(1574-1656)이 글씨를 썼다.

비석의 높이는 187cm, 너비는 86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