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박한주 여표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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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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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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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甲子士禍)로 죽음을 말한 연산군(燕山君) 때의 간관(諫官) 박한주(朴漢柱)의 충절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박한주의 자(字)는 천지(天支), 호(號)는 우졸자(迂拙子),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다. 1485년[성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예천현감(禮泉縣監)을 지냈다. 연산군 대간관이 되어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다가 1498년 무오사회(戊午士禍)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 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서울에서 처형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비석은 1657년 [천종8]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217sm, 폭은 89.5cm, 두께는 27cm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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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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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한주(朴漢柱, 1459~150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비와 비각은 1857년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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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주는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이다. 148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인 함안과 가까운 지역인 창녕 현감을 지냈다. 그곳에서 백성을 교화한 업적이 두드러져 포상과 작위를 받았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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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498년 국정을 비방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고, 1504년 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1506년 억울한 죄를 벗었으며, 사후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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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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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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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박한주 여표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610000,38&pageNo=1_1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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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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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졸재 박한주 비”, 디지털함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ham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haman&dataType=99&contents_id=GC06200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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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졸재 박한주 비”, 디지털함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ham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haman&dataType=99&contents_id=GC06200472) - 이 기사에 따르면 ‘숭정 기원 후 사 정사 시월(崇禎紀元後四丁巳 十月)’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숭정기원후사정사는 1857년입니다. 기존 안내판 문안에는 1657년으로 되어 있고,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에는 1629년이라고 합니다. 실제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0년 6월 9일 (화) 09:44 판

함안 박한주 여표비
함안 박한주 여표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안 박한주 여표비
한자 咸安 朴漢柱 閭表碑
주소 경남 함안군 가야읍 고분길 286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지정일 1997년 12월 3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안 박한주 여표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죽음을 말한 연산군(燕山君) 때의 간관(諫官) 박한주(朴漢柱)의 충절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박한주의 자(字)는 천지(天支), 호(號)는 우졸자(迂拙子),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다. 1485년[성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예천현감(禮泉縣監)을 지냈다. 연산군 대간관이 되어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다가 1498년 무오사회(戊午士禍)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 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서울에서 처형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비석은 1657년 [천종8]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217sm, 폭은 89.5cm, 두께는 27cm이다.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한주(朴漢柱, 1459~150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비와 비각은 1857년에 지었다.

박한주는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이다. 148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인 함안과 가까운 지역인 창녕 현감을 지냈다. 그곳에서 백성을 교화한 업적이 두드러져 포상과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498년 국정을 비방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고, 1504년 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1506년 억울한 죄를 벗었으며, 사후 추증되었다.

자문의견

2차 수정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