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박한주 여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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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박한주 여표비
함안 박한주 여표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안 박한주 여표비
한자 咸安 朴漢柱 閭表碑
주소 경남 함안군 가야읍 고분길 286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지정일 1997년 12월 3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안 박한주 여표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죽음을 말한 연산군(燕山君) 때의 간관(諫官) 박한주(朴漢柱)의 충절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박한주의 자(字)는 천지(天支), 호(號)는 우졸자(迂拙子),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다. 1485년[성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예천현감(禮泉縣監)을 지냈다. 연산군 대간관이 되어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다가 1498년 무오사회(戊午士禍)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 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서울에서 처형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비석은 1657년 [천종8]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217sm, 폭은 89.5cm, 두께는 27cm이다.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한주(朴漢柱, 1459~150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비와 비각은 1857년에 지었다.

박한주는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이다. 148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인 함안과 가까운 지역인 창녕 현감을 지냈다. 그곳에서 백성을 교화한 업적이 두드러져 포상과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498년 국정을 비방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고, 1504년 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1506년 억울한 죄를 벗었으며, 사후 추증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조선 전기 문신 박한주(朴漢柱, 1459~1504, 본관 ; 밀양)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던 경상북도 청도군에 세운 비이다. 1629년(인조 7)에 세워진 비와 비각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박한주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본관 ; 선산)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한성부참군, 사헌부감찰, 성균관전적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 함안과 창녕현감을 지냈다. 현감 역임 중 백성을 교화한 업적이 두드러져 임금이 비단과 교서로 포상하였다.
    • 무오사화(1498, 연산군 4) 당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하였다는 죄로 평안도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1504, 연산군 10) 때 처형당했다. 중종반정(1506) 후에 누명을 벗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 비 몸과 귀부, 이수를 갖추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308㎝이다. 이수에는 용 무늬가, 귀부에는 거북 무늬가 뚜렷하다. 비 몸의 가장 윗부분에 가로로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명(迂拙齋朴漢柱閭表碑銘)’이, 세로로 전서체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함안이라는 지명이 이 문화재의 정식 명칭에 포함되는지 확인하여 그렇지 않다면 생략하는 것이 좋겠음.
    • 그러나 1498년 국정을 비방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고, 1504년 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1506년 억울한 죄를 벗었으며, 사후 추증되었다. → 그러나 연산군대 1498년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억울한 죄를 벗고 벼슬을 추증받았다.
      • 수정이유: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반정 등은 일반적으로 익히 배운 사실이므로 그것을 정확히 기재해주는 것이 좋겠음. 이미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기재되었고, 추증이라는 단어에도 그 뜻이 들어가 있으므로 ‘사후 추증’이라는 기술은 적절하지 않음.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한주(朴漢柱, 1459~150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던(살던 -> 살았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라는 뜻이다(비석이라는 뜻이다 -> 비석이다.). 비와 비각은 1857년에 지었다.

2차 수정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한주(朴漢柱, 1459~150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았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다. 비와 비각은 1857년에 지었다.

박한주는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이다. 148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인 함안과 가까운 지역인 창녕 현감을 지냈다. 그곳에서 백성을 교화한 업적이 두드러져 임금이 비단과 교서로 포상하였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 당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하였다는 죄로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누명을 벗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과 머릿돌을 갖추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308㎝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