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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에 사닭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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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찾아 놀러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는데, 좋은 돌을 얻어 쓸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갈문왕께서 찾아 놀러 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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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곡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 온 이는 갈문왕의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으로, 성스러운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 분이다.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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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왕 일행의 행차를 주관한 관리는 대나마 이리부지와 대사제지 실득사지이고, 식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일길간지 □□지의 아내 거지시해부인과 사간지 진육지의 아내 아혜모홍부인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대사제지 모모이지이다.
좋은 돌을 얻어 쓸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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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마 이리부지, 대사제지 실득사지, 일길간지 □□지, 사간지 진육지, 대사제지 모모이지 → 관직 + 이름 순으로 표기한 것임.''
서석곡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 온 우매는 성스러운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 어사추
 
여랑님이시다. (식)다잘공인은 이리부지 나(마)와
 
실득사지 대사제지이며, 식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지일길간지의 처인 거지시해 부인과 진육지
 
사간지의 처인 아혜모홍 부인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모모이지 대사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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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과 누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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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의 갈문왕과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년이 지나갔다. 매왕을 생각하니 매왕은 죽은 사람이다. 537년에는 갈문왕이 죽었다.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가 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셔서, 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539년 7월 3일 계곡에 왔다. 이때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갈문왕의 아들인 심맥부까지 셋이 함께 왔다.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년을(?)사년(?)이 지나갔다. 매왕을 생각하니 매왕은 죽은 사람이다.  
 
정사년(537)에는 (사부지)왕이 죽었다.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가 (사부지)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셔
 
기미년 7월 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때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자인 랑심△맥부지 셋이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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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1일 (토) 16:49 판

울주 천전리 각석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Inscriptions and Petroglyphs of Cheonjeon-ri, Ulju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영문명칭 Inscriptions and Petroglyphs of Cheonjeon-ri, Ulju
한자 蔚州 川前里 銘文과 岩刻畫
주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
지정번호 국보 제147호
지정일 1973년 5월 4일
분류 유물/일반조각/암벽조각/각석
소유자 국유
관리자 울주군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종합안내판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태화강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현 대곡천)에 있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울주 지역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중 마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암각화이다.

너비 약 9.8m, 높이 약 2.7m 규모의 중심 바위면과 주변 바위면 4곳에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신라 때까지 오랜 시대에 걸쳐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중심 바위면은 약 2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를 보호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그림 625점이 새겨져 있는데, 한 바위면에 시대별로 일정한 구획을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바위면의 왼쪽 상단에는 사슴, 물고기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바위면의 중앙 상단에는 동심원, 마름모, 물결 무늬와 같은 청동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위면의 하단에는 행렬 그림과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 신라 때의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신라 때의 명문은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선사시대 암각화

선사시대 암각화는 크게 구체적인 그림과 추상(抽象) 그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체적인 그림은 마주 보고 있는 사슴 한 쌍, 고래, 물고기, 상어와 같은 동물 그림과 활과 화살을 들고 사슴을 사냥하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들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형태가 비슷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그림보다 먼저 그려져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그림은 신석기시대 당시 한반도의 생태환경과 수렵문화를 잘 보여 준다.

추상 그림으로는 마름모, 동그라미, 동심원, 나선, 물결 모양 등 다양하다. 특히 동심원, 물결 모양 그림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나 유물에서 확인되는 문양과 비슷하여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지면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던 사람들이 태양, 하늘, 땅과 같은 자연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의 그림과 명문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에는 금속 도구를 이용하여 신라 때 그린 사람, 배, 용, 행렬 그림과 함께 한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옷을 입은 사람, 돛을 단 배, 말을 탄 행렬 그림은 신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용은 신라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상상의 동물로 그들이 생각하는 용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자로 기록된 다양한 명문은 정확한 연대와 함께 누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명문에는 6세기 전반의 신라 왕족과 귀족, 승려, 화랑들의 이름과 기록이 될 만한 업적, 소망들이 들어 있다. 이 명문은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원명과 추명이라 불리는 명문은 바위면을 편편하게 다듬은 다음 테두리를 사각으로 만들어 글을 새겼다. 오른쪽을 먼저 새기고(원명), 왼쪽을 나중에 새겼다(추명). 왕과 왕비가 이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 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명(먼저 새겨진 글, 을사명(법흥왕 12년))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乙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多煞作功人尒利夫智奈□
悉得斯智大舍帝智 作食人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人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慕尒智大舍帝智

을사년~에 사닭부의
갈문왕께서 찾아 놀러 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는데,
좋은 돌을 얻어 쓸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서석곡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 온 우매는 성스러운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 어사추
여랑님이시다. (식)다잘공인은 이리부지 나(마)와
실득사지 대사제지이며, 식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지일길간지의 처인 거지시해 부인과 진육지
사간지의 처인 아혜모홍 부인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모모이지 대사제지이다.

추명(나중에 새겨진 글, 기미명(법흥왕 26년) )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 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과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년을(?)사년(?)이 지나갔다. 매왕을 생각하니 매왕은 죽은 사람이다.
정사년(537)에는 (사부지)왕이 죽었다.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가 (사부지)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셔
기미년 7월 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때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자인 랑심△맥부지 셋이 함께 왔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종합안내판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태화강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현 대곡천)에 있다. 1970년 12월 마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으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암각화이다. 암각화란 바위, 절벽, 동굴의 벽면에 기호,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 놓은 것으로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다. 한국의 암각화는 풍요, 다산, 안녕을 기원하는 의도로 그렸다고 짐작한다.

너비 약 9.8m, 높이 약 2.7m 규모의 중심 바위면과 주변 바위면 4곳에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신라시대에 걸쳐 다양한 그림이 새겨졌다. 중심 바위면은 약 2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를 보호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그림 625점이 새겨져 있는데, 시대별로 일정한 구획을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바위면의 왼쪽 상단에는 사슴, 물고기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고, 바위면의 중앙 상단에는 동심원, 마름모, 물결 무늬와 같은 청동기시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위면의 하단에는 행렬 그림과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 신라 때의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신라 때의 명문은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선사시대 암각화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천전리 암각화는 크게 구체적인 그림과 추상 그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체적인 그림은 마주 보고 있는 사슴 한 쌍, 고래, 물고기, 상어와 같은 동물 그림과 활과 화살을 들고 사슴을 사냥하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들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형태가 비슷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그림보다 먼저 그려져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그림은 신석기시대 당시 한반도의 생태환경과 수렵문화를 잘 보여 준다.

추상 그림은 마름모, 동그라미, 동심원, 나선, 물결 모양 등 다양하다. 특히 동심원, 물결 모양 그림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나 유물에서 확인되는 문양과 비슷하여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지면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던 사람들이 태양, 하늘, 땅과 같은 자연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의 그림과 명문

신라 때에는 금속 도구를 이용하여 사람, 배, 용, 행렬 그림과 한자 명문을 새겼다.

옷을 입은 사람, 돛을 단 배, 말을 탄 행렬 그림은 신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용은 신라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상상의 동물로 그들이 생각하는 용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바위 전체 여기저기에 새겨진 250여 개의 명문은 명문을 새긴 정확한 연대와 함께 누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이 명문들에는 6세기 전반의 신라 왕족과 귀족, 승려, 화랑들의 이름과 기록이 될 만한 업적, 소망들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바위 중간 부분 아래 쪽에 있는 2개의 명문이다. 두 명문은 바위면을 편편하게 다듬은 다음 테두리를 사각으로 만들어 글을 새겼다. 오른쪽은 525년에 시겼고 왼쪽은 539년에 새겼다. 왕과 왕비가 이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재위 514-540) 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명(먼저 새겨진 글, 을사명(법흥왕 12년))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乙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多煞作功人尒利夫智奈□
悉得斯智大舍帝智 作食人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人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慕尒智大舍帝智

을사년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찾아 놀러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는데, 좋은 돌을 얻어 쓸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서석곡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 온 이는 갈문왕의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으로, 성스러운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 분이다.
갈문왕 일행의 행차를 주관한 관리는 대나마 이리부지와 대사제지 실득사지이고, 식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일길간지 □□지의 아내 거지시해부인과 사간지 진육지의 아내 아혜모홍부인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대사제지 모모이지이다.

    • 대나마 이리부지, 대사제지 실득사지, 일길간지 □□지, 사간지 진육지, 대사제지 모모이지 → 관직 + 이름 순으로 표기한 것임.
추명(나중에 새겨진 글, 기미명(법흥왕 26년) )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 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의 갈문왕과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년이 지나갔다. 매왕을 생각하니 매왕은 죽은 사람이다. 537년에는 갈문왕이 죽었다.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가 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셔서, 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539년 7월 3일 계곡에 왔다. 이때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갈문왕의 아들인 심맥부까지 셋이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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