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부나원루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驛院)공영제도에 의하여 예안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다른 건물도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누각만 남아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부내에 27개의 원(院)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소멸되고 당시의 누각이 남아 있는 곳은 이 곳이 유일하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이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인 것으로 보아 16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건물로 윗부분은 대청이며 주위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누의 아래기둥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기둥이고 상부기둥은 원형기둥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5년에 이 곳으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고려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895년 근대 통신수단의 도입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역원(驛院) 제도에 의해 예안현에 소속되어 있던 ‘부나원(浮羅院)’의 누각이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긴급한 군사정보를 전달하며,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물자의 전송을 담당하던 교통통신기관이다. 정부 관리들이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행할 때, 이곳에서 숙박하거나 말을 빌려 탈 수도 있었다. 원은 대개 역과 역 사이에 공무로 출장 중인 관리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한국에서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인 5세기 경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역로망을 형성해 운영했다.
이 지역 지리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에는 27개의 원이 있었으며, 부라원은 원래 부포리 마을 앞 들판에 있었다고 한다. 원사(院舍) 등 여러 건물이 있었지만 다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판의 글씨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난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것이기 때문에 16세기 경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층은 대청마루로 꾸며져 있고,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왼편에 출입을 위한 사다리를 놓았다. 아래층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의 기둥을 쓰고, 위층은 원형으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1차 수정
부라원루는 역원(驛院) 제도에 따라 예안현에 설치되어 있던 부라원의 누각이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긴급한 군사정보를 전달하며,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물자의 전송을 담당하던 교통통신기관이고, 원은 공적인 임무로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공공 여관이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에는 27개의 원이 있었으며, 부라원은 원래 부포리 마을 앞 들판에 있었다고 한다. 부라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지만 다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는데,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판의 글씨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난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것이기 때문에 16세기 경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층은 대청마루로 꾸며져 있고, 사방에 난간을 둘렀으며, 왼편에 출입을 위한 사다리를 놓았다. 아래층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의 기둥을 쓰고, 위층은 원형으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