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임대정 원림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화순 임대정 원림
Imdaejeong Garden, Hwasun
화순 임대정 원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화순 임대정 원림
영문명칭 Imdaejeong Garden, Hwasun
한자 和順 臨對亭 園林
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상사1길 48 일원 (사평리 601 일원)
지정번호 명승 제89호
지정일 2012년 4월 10일
분류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경관
수량/면적 11,027㎡
웹사이트 화순 임대정 원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화순 임대정 원림은 사평 출신으로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사애(沙厓) 민주현(閔冑顯, 1808~1882)이 1862(철종 13)년에 정자를 지어 조성한 원림이다.

민주현의 <임대정기(臨對亭記)>에 의하면 이곳은 풍광이 수려해서 선조 대의 문인인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 1534년∼?)가 정자를 지어 수륜대(垂綸臺)라 이름하고 원유 생활(園遊生活)을 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황폐되었던 이곳을 사애 선생이 수림을 조성하고, 연못도 다듬고, 정자를 지어 임대정이라 하였다. 임대정은 송나라 주돈이의 ‘종조임수대려산(終朝臨水對廬山, 아침 내내 물가에서 여산을 대한다.)’이라는 시구에서 그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민주현의 <임대정기>에 ‘수취종조임수대려산지구 명이임대(遂取終朝臨水對廬山之句 名以臨對)’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사애 민주현이 고향 사평에 임대정을 건립한 것은 55세 때인 1862년이다. 44세 되던 1851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언 정언, 사헌부 장령을 거쳐 54세 되던 1861년에 사헌부 집의를 제수받는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화도연명귀거래사(和陶淵明歸去來辭)>라는 글[부(賦)]을 짓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집인 <사애집(沙厓集)> 권1에 ‘신유시월 자경하래이작(辛酉十月 自京下來而作, 신유년(1861, 철종 12) 10월에 서울에서 내려와 지었다.)’이라고 쓰여 있다.

임대정을 건립하면서 지은 <임대정기> 첫머리에는 ‘임술조하(壬戌肇夏)’라는 연대를 기록하고 있어 1862년 초여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작은 정자를 지어 더위를 가시게 하고자 한 칸 초가를 지었음(構小榭以爲消暑之計乎....構成一間草廬)을 적고 있어 민주현이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단칸 초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新築小亭杏種陰 작은 정자를 살구나무 곁에 새롭게 지으니
箇中幽興倍難禁 곳곳의 그윽한 흥취 배가 됨을 금할 수 없네
碧臺間有待明到 푸른 누대 사이에서 밝아 오길 기다리고
爭席時看野老尋 자리 다투며 때때로 들에서 일하는 촌로를 바라보네

민주현은 다시 병조 참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66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우분(憂憤)을 이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십만 양병책(十萬養兵策)을 주장하는「청양병위이비완급지책(請養兵威以備緩急之策)」을 상소하였다.

임대정은 건립 이후, 때로는 은둔처로, 때로는 교류와 강학처로 활용되었으며 1922년에 기와 지붕으로 중건되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서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후손 민용호(龍鎬, 1869~1922)가 지은 <임대정중건상량문>(신유년, 1921)과 민병승(丙承, 1866~?)의 <임대정중수기>(병자년, 1936)를 통하여 1921년에 중건 상량하여 1922년에 준공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주도한 이는 민대호, 민용호, 민긍호 등이다. 그리고 김문옥(金文鈺, 1897~1965)의 <임대정중건기>(갑술년, 1964)를 통하여 1964년에도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1985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국가 지정 문화재인 명승으로 승격되어 한국의 자연유산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문

Imdaejeong Garden, Hwasun

Imdaejeong Garden was established in 1862 by the civil official Min Ju-hyeon (1808-1882). Located in Min’s home village of Sapyeong-ri, Hwasun, the garden consists of several ponds, a wide variety of trees, and a wooden pavilion, after which it is named.

Min Ju-hyeo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851 and went on to serve in the offices of the censor-general and inspector-general. In 1861, he returned home and established this garden the following year. He then continued his official career, serving as second minister of war and second royal secretary, before retiring in 1866. Later that year, Korea was attacked by France at Ganghwado Island. Deeply alarmed by this event, Min wrote a petition to the king insisting on military mobilization and preparations for any potential future foreign interventions.

According to the Record of Imdaejeong Pavilion written by Min, the garden was established on the site of a pavilion belonging to the scholar Nam Eon-gi (1534-?). Known for its outstanding views, the site had fallen into disrepair, so in addition to building a new pavilion, Min Ju-hyeon planted new trees and dug several lotus ponds. The pavilion was originally built as a small, thatched-roof structure that provided shelter from the summer heat. Its name Imdaejeong, meaning “Pavilion of Facing Frontward,” comes from a line in a poem by the Chinese philosopher Zhou Dunyi (1017-1073) that reads, “All morning, [I sit] with water in front [of me], facing Lushan Mountain."

To commemorate the pavilion’s completion, Min Ju-hyeon wrote the following poem, originally in classical Chinese, using the rhyming characters of the Chinese scholar Zhu Xi (1130-1200):

The little pavilion, newly built, is shaded by the apricot tree. Therein, a deep excitement multiplies [at a rate] difficult to restrain. Awaiting the arrival of light among the green terraces, I watch the elderly farmers, who sometimes fight over their spots.

Used as both a place of seclusion and as a venue for academic gatherings and lectures, the pavilion was remodeled in 1921-1922 by three of Min’s descendants, namely Min Dae-ho, Min Yong-ho, and Min Geung-ho, at which time the thatched roof was replaced with tiles. It was renovated again in 1964. The current pavilion faces northwest, features a hip-and-gable roof, and consists of an underfloor-heated room with a wooden-floored veranda along the front and sides. The garden was designated as a Jeollanam-do Monument in 1985 and promoted to a Scenic Site in 2012.

영문 해설 내용

임대정 원림은 조선시대의 문신 민주현(1808-1882)이 1862년에 조성하였다. 민주현의 고향인 화순 사평리에 위치한 이 원림은 여러 개의 연못, 다양한 나무들과 임대정이라는 정자로 이루어져 있다.

민주현은 1851년 과거에 급제한 뒤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861년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 임대정을 지었다. 이후 민주현은 다시 관직에 나가 병조참판과 좌승지 등을 지냈고 1866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하게 여기다가, 군사를 모집하여 후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민주현이 남긴 「임대정기」에 따르면 임대정이 위치한 곳은 학자 남언기(1534-?)가 지은 정자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빼어난 풍광으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황폐해졌고, 이곳에 민주현이 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 원래 임대정은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지은 한 칸짜리 초가지붕 건물이었다. ‘임대정’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시의 ‘종조임수대려산(終朝臨水對廬山, 아침 내내 물가에서 여산을 대한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임대정이 완성된 후, 민주현은 주자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新築小亭杏種陰 작은 정자를 살구나무 곁에 새롭게 지으니 箇中幽興倍難禁 곳곳의 그윽한 흥취 배가 됨을 금할 수 없네 碧臺間有待明到 푸른 누대 사이에서 밝아 오길 기다리고 爭席時看野老尋 자리 다투며 때때로 들에서 일하는 촌로를 바라보네

임대정은 건립 이후, 때로는 은둔처로, 때로는 교류와 강학처로 활용되었다. 1921년 민주현의 후손 민대호, 민용호, 민긍호 등이 기존의 건물을 기와지붕 건물로 바꿔 짓기 시작하였고 1922년에 완공하였다. 임대정은 1964년에도 한 차례 중건하였고, 지금의 정자는 서북향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우물마루와 온돌방 한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5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갤러리

참고자료

주석

  1. 노재현, 박태희, 신상섭, 김현욱, 「기문(記文)을 중심으로 고찰한 임대정원림(臨對亭園林)의 입지 및 조영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v.29, no.4, 2011,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