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암 정희량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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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정희량 유허지
Historic Site Related to Jeong Hui-ryang
대표명칭 허암 정희량 유허지
영문명칭 Historic Site Related to Jeong Hui-ryang
한자 虛庵 鄭希良 遺虛址
주소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 산 61-5
지정(등록) 종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8호
지정(등록)일 2009년 3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3,500㎡
웹사이트 허암 정희량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은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이자 문신으로 명망 높던 정희량이 잠시 은거하던 옛터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정희량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이다. 정희량은 1469년(예종 1년)에 태어나 1495년(연산군 1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던 중에 무오사화(戊午史禍:1498년)를 당하게 되고 이때 윤필상 등에 의해 탄핵을 받아 신용개, 김전 등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된다. 1502년(연산군 8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 해에 모친상을 당하게 된다. 정희량은 상(喪)을 치르던 중 장차 갑자사화(甲子事禍:1504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홀연히 집을 나갔다. 그리고 김포 강가에 상복(喪服)과 짚신을 벗어놓고 죽은 것처럼 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곳 허암산(虛庵山)에 은거하면서 수년간 머물다가 소문이 퍼져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다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름과 성을 바꾸고 전국을 방랑하며 걸식도 하고 중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치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영문

Historic Site Related to Jeong Hui-ryang

This is the former site of the house where Jeong Hui-ryang (1469-1502), a scholar and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emporarily lived in seclusion.

Jeong Hui-rya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95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was well-known for his scholarly and literary achievements and even participated in the compilation of the Annals of King Seongjong. However, during the literati purge of 1498, he received unjust accusations from his political opponents, which led to his resignation and exile. In 1502, as Jeong was released from exile, his mother died. While spending the required multi-year mourning period by her tomb, he predicted another literati purge would occur in 1504 and decided to leave town. To cover his tracks, he staged his death by leaving his mourning clothes and straw shoes at a riverbank in Gimpo. It was here on Heoamsan Mountain that he lived in seclusion for several years. However, as rumors of his whereabouts began to spread, he began to feel threatened, so he moved to another undisclosed location. It is said that he spent the rest of his life wandering across the country under a different name, teaching children, becoming a Buddhist monk, and at times, even resorting to begging.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정희량(1469-1502)이 잠시 은거하던 집의 옛터이다.

정희량은 149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1498년 사화 때 정적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었다. 1502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같은 해 모친상을 당하였고,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다가 1504년 또 다른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홀연히 집을 나갔다. 그리고 김포 강가에 상복(喪服)과 짚신을 벗어놓고 죽은 것처럼 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곳 허암산에 은거하면서 수년간 머물다가 소문이 퍼져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다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름과 성을 바꾸고 전국을 방랑하며, 걸식도 하고 중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