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호연정
합천 호연정 Hoyeonjeong Pavilion, Hapch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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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호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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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oyeonjeong Pavilion, Hapcheon |
한자 | 陜川 浩然亭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문림길 40-19 (율곡면)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8호 |
지정(등록)일 | 1981년 12월 2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합천 호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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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호연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요당 주이(二樂堂 周怡, 1515~1564)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본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후손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다시 지었다.
정문인 인지문(仁智門)을 지나면 경내에 호연정과 사당인 영모사(永慕祠),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호연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2칸은 대청마루로, 1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방(昌枋)은 곡선으로 휘어진 원목 그대로 사용하였다. 각 기둥도 자연그대로 옮겨와 굵기가 각각 다르다.
주변에는 고목들이 울창한데, 이요당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와 녹죽(綠竹)이 있다.
- 창방(昌枋) : 건축부재의 하나. 공포가 있는 목조건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가로재이다.
영문
Hoyeonjeong Pavilion, Hapcheon
Hoyeonjeong Pavilion was first built by the civil official Ju I (1515-1564). Ju I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46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When he returned to his hometown after retirement, he built the pavilion and dedicated himself to studying and teaching.
The original building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and the current building was constructed circa the mid-17th century by Ju I’s descendants. Apart from the pavilion and its main gate, the complex includes a pavilion housing a stele commemorating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Ju I, as well as two shrines for the veneration of the founder of the Sangju Ju Clan and other honored ancestors.
The pavilion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on the left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on the right. As it was built out of minimally processed natural materials, the pillars differ in thickness and the lintels between the pillars have a naturally curved shape.
영문 해설 내용
호연정은 문신 주이(1515-1564)가 지었다. 주이는 1546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정자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17세기 중반 무렵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경내에는 정문, 호연정 외에도 주이를 기리는 비석을 모신 비각, 상주주씨 시조의 위패를 모신 영모사,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호연정은 왼쪽의 대청과 오른쪽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부재를 사용하여, 각 기둥의 굵기가 각각 다르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한 창방도 휘어진 모습이다.
참고자료
- 주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385 ->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정에서 여러 차례 교리(敎理)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은 『효경(孝經)』·『가례(家禮)』를 표준으로 하였고, 타고난 성품과 거동이 훌륭하여 신선 같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 합천 호연정,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1980000&pageNo=1_1_1_1 -> 앞면 3칸·옆면 2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지붕 밑에 휜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마치 꿈틀대는 용 같아서 장식적 효과가 크다. 전체적으로 부재가 장식적이며 두 가지의 건축양식을 혼용해 쓰고 있어 건물구조에 변화가 많다. 정자 주변은 주이가 직접 심었다는 여러 그루의 대나무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상주인 이요당 주이와 합천 호연정 은행나무, 매일신문 2013.1.24.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3012414341524800 -> 아호 이요당(二樂堂)은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즉 '지혜 있는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한다'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특히 당숙(堂叔)인 주세붕은 공의 비범한 재능을 알고 '너야말로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은 예안현감을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호연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아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퇴계가 '신재집'(愼齋集)을 교정하다가 문제가 있으면 제자를 시켜 "글 가운데 적당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예안공(禮安公'이요당을 말함)과 상의하라"하였다고 한다.
-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정자, 합천 호연정_170127, 겨울섬, 개인블로그 https://gotn.tistory.com/313 -> 경내 배치도 이미지 확인 가능
- 의령 유학사 합천 호연정 바람재, 여행같은 산행,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mmundi/222055305858 -> 실제 답사 사진 / 정자에는 서로 다른 글씨체로 쓴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 합천 호연정, 가서 보고,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kang1953/1758 -> 현장 사진(2019)
- <참고> 상주 주씨, 디지털함안문화대전 http://haman.grandculture.net/haman/toc/GC06200677 -> 상주 주씨는 당나라 덕종 때 병부시랑을 지내고 신라에 들어와 병부령(兵部令)과 상주 총관(尙州摠管)을 역임한 주이(周頤)를 시조로 삼고, 상주(尙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19세손 주유(周瑜)는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공양왕을 폐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상주에 은거했다가 다시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栗谷面) 문림리(文林里)로 이거하면서 도은공파(陶隱公派)의 중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