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주필각, 월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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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주필각‧월화당
Jupilgak Pavilion and Wolhwadang Hall, Hapcheon
합천 주필각‧월화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주필각‧월화당
영문명칭 Jupilgak Pavilion and Wolhwadang Hall, Hapcheon
한자 陜川 駐蹕閣‧月華堂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정토양림길 199 (적중면)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지정(등록)일 1990년 1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4동
웹사이트 합천 주필각‧월화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월화당 노극복(月華堂 盧克復, 1576~1635)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던 곳이다. 노극복은 조선 중기 학자로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길보(吉甫), 호는 월화당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문예가 뛰어났으며, 정온(鄭蘊)·심광세(沈光世)·임진무(林鎭懋) 등과 함께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그는 학식이 해박하여 1623년 인조반정 뒤 유일(遺逸)로 등용되어 곧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니, 왕이 그의 집을 ‘월화당’이라 하였다.

건물은 언제 세웠는지 기록은 없지만 숙종 21년(1695)에 후손들이 고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주필각은 월화당 뒤쪽에 있는데, 인조가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라고 하며 역마가 머물던 곳이라고도 전한다.

영문

Jupilgak Pavilion and Wolhwadang Hall, Hapcheon

Wolhwadang Hall was used as the residence of No Geuk-bok (1576-1635, pen name: Wolhwadang),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It is uncertain when it was first built, but the current building was renovated by No’s descendants in 1695. Jupilgak Pavilion was built to commemorate a visit by Prince Neungyanggun (later King Injo, r. 1623-1649) in 1619.

Since childhood, No Geuk-bok was famous for his erudition and noble character. The news about him reached Prince Neungyanggun, who decided to visit No’s house and meet him in person. The prince was so impressed by No’s virtue and learning that he bestowed upon No the pen name Wolhwadang, meaning “Hall of Bright Moonlight,” which also became the name of No’s house. After the prince became king, he appointed No to various official posts, but No soon resigned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devoted himself to his scholarly studies.

Jupilgak Pavilion was built behind Wolhwadang Hall, on the spot where Prince Neungyanggun tied up his horse during his visit. The name of the pavilion can be interpreted to mean “the place where the king stopped during his journey.”

영문 해설 내용

월화당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노극복(1576-1635, 호: 월화당)이 살던 곳이다.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후손들이 1695년에 고쳐 지었다. 주필각은 능양군(후의 인조, 재위 1623-1649)이 1619년에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노극복은 어려서부터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로 유명했다. 노극복의 명성을 들은 능양군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처소를 방문하였고, 그의 학덕에 탄복하며 '밝은 달빛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로 '월화당'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노극복의 집도 그의 호를 따라 불렸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노극복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노극복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곧 사직하고 고향에 머물렀다.

월화당 뒤편에 있는 주필각은 능양군이 방문했을 때 타고 온 말을 매어 놓았던 자리에 지은 것이다. 주필각이라는 이름은 ‘왕이 행차하였을 때 머문 곳’이라는 뜻이다.

참고자료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주필각및월화당, 달,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amlhd2&logNo=220483746786&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답사 사진. 건물 뒤쪽 확인 가능.
  • 주필각및월화당, doopedia https://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012000713267#hedaer -> 건물 뒤쪽 사진 상세(나무판벽 – 중앙에 문처럼 여닫을 수 있게 되어있음)
  • 월화당 노선생 향례 거행, 합천 인터넷 뉴스 http://m.hcinews.asia/view.asp?intNum=1468&ASection=001002 -> 본 제실 뒤편에는 주필각이 있다. 이것은 광해군 11년(1619년)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측근인 휴옹(休翁) 심광세에게 “이 시대에 가장 덕망 높은 선비가 누구냐”고 묻자 초계에 있는 노극복이라는 대답을 듣고 인조가 현재 월화당 제실이 있는 노 선생의 처소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때 인조가 타고 온 말(馬)을 메어 놓은 장소가 주필각이다. 인조가 즉위하고 노 선생에게 벼슬을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사양하였다고 한다.
  • 노극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656
  • 1931년 월화당계 통문, 한국학자료센터 영남권역센터 http://yn.ugyo.net/dir/list?uci=KSAC%2BY05%2B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66 -> 이 통문은 1931년 4월 13일 월화당계에서 월화당 노극복의 사당과 인조가 잠시 머문 주필각을 복원하는데 옥산서원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다. / 노극복은 우복 정경세의 문인으로 은거하던 선비였다. 인조가 능성군 시절에 고성으로 유배된 휴옹 심광세를 위문하러 갔다가 노극복이 진정 군자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능성군이 그가 있는 월라정으로 찾아가 만나보고는 그의 인품과 학식에 감탄하여 월화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극복의 후손인 광주노씨들은 1695년(숙종 21) 사림과 힘을 합하여 월화당을 중건하고, 그 남쪽에 인조의 주필각을 건립하였다. / 월화당은 노극복이 도학을 강학하던 곳으로 원래의 명칭은 月蘿亭이었다. 그런데 인조가 능성군 시절 沈光世로부터 영남의 군자다운 학자가 노극복이라는 소리를 듣고 만나보니 듣던 것과 마찬가지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나 그에게 月華堂이라는 號를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