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최치원 신도비
함양 최치원 신도비 Stele of Choe Chi-won, Hamyang |
|
대표명칭 | 함양 최치원 신도비 |
---|---|
영문명칭 | Stele of Choe Chi-won, Hamyang |
한자 | 咸陽 咸陽 崔致遠 神道碑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
지정(등록)일 | 1983년 7월 20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함양 최치원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이 비석은 신라 진성여왕(887~897) 때 천령군(함양군) 태수(신라 시대의 지방 관직)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그 종가의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최치원의 자(字)는 고운 또는 해운(海雲), 시호(諡號)는 문창(文昌)이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뛰어난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태산(현 정읍시), 부성(현 서산시), 천령(현 함양군) 등의 태수를 지냈는데 당시 국정의 문란함에 실망하여 마지막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다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비석에는 최치원의 약력과 저작물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함양을 다스릴 때 벌하지 않아도 화합이 잘 되었으며 손수 나무를 심었다 ’라고 하여 민심을 바르게 하고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상림 숲을 조성한 일 등이 당시의 군민들에게 높이 칭송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영문
Stele of Choe Chi-won, Hamyang
This stele was erected in 1923 by members of the Gyeongju Choe clan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Choe Chi-won (857-?), a great Confucian scholar of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Choe Chi-won served as a local governor of Cheollyeong-gun County (today’s Hamyang area).
In 868, at the age of 12, Choe went to study in Tang China. In 874, he placed first i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for foreigners there and took an official post. In 879, when Huang Chao started a rebellion in China, Choe Chi-won wrote him a well-known manifesto, which made him widely famous as a skillful writer. Later in 885, he came back to Silla and tried to fix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in the country but did not succeed. Disappointed, he retired from his official post and lived the rest of his life in seclusion. He left a multitude of outstanding written pieces and was called the founder of the Korean writing style. He was also later enshrined at the state Confucian shrine (called munmyo in Korean) together with other renowned Confucian scholars.
The stele bears an inscription which says that when Choe Chi-won served in this area, he was quick to appease the sentiment of the local people by making an embankment and planting a forest to prevent flooding, which was highly appreciated by the citizens at that time.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인 최치원(857~?)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최치원은 천령군(지금의 함양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당의 관직을 지내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이에 좌절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유교의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신도비에는 최치원이 이 지역을 다스릴 때 민심을 바르게 하였고,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손수 숲을 조성하여 당시 군민들에게 높이 칭송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