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Stele and Tomb Marker of Kim Seong-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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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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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and Tomb Marker of Kim Seong-il |
한자 | 鶴峯 神道碑 及 墓傍石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수내길 38-15 (서지리)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
지정(등록)일 | 1999년 12월 30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2기 |
웹사이트 |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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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이고, 묘방석은 묘의 주인공을 밝히기 위해 묘의 바로 옆에 두는 석조물이다.
학봉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수제자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선조 23년(1590)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입할 정황을 보지 못했다고 보고하여 임진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사면되고 다시 경상도 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 확보에 힘썼으며, 곽재우 등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진주대첩 승리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진주성에서 계속 항전 중에 병사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짓고, 서예에 뛰어났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글씨를 썼으며, 앞면 맨 위에 새겨진 비의 이름은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글씨이다. 비각은 현종 5년(1664)에 세워졌다.
김성일의 묘 오른쪽에 있는 묘방석은 광해군 11년(1619)에 세워졌다.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팔 때 나온 큰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글씨를 새겼다. 앞면에는 퇴계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정구(鄭逑, 1543~1620)의 글이 새겨져 있다.
-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영문
Stele and Tomb Marker of Kim Seong-il
This stele was erected in 1634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the scholar and civil official Kim Seong-il (1538-1593). This tomb marker was erected in 1619 to identify the site of Kim Seong-il’s tomb.
Kim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8 and served various high official posts. As one of the distinguished disciples of the renowned Confucian scholar Yi Hwang (1501-1570), he played a pivotal role among scholars of the Gyeongsang-do area. In 1590, Kim visited Japan as an envoy and reported back that Japan had no intentions to invade Korea. However, just two years later, his remarks proved incorrect. To make up for his mistake, he desperately devoted himself to fighting against the Japanese. He urged people to join civilian armies and dedicated himself to providing food for the troops. He died of illness during a battle against the enemy at Jinjuseong Fortress.
The granite stele consists of a tortoise-shaped pedestal, a body stone with an inscription, and a capstone engraved with cloud and dragon designs.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civil official Jeong Gyeong-se (1563-1633) and calligraphed by the calligrapher Yi San-hae (1539-1609). The name of the stele inscribed at the very top was calligraphed by the civil official Kim Sang-yong (1561-1637). The pavilion in which the stele is kept was built in 1664.
The tomb marker is located to the right of Kim Seong-il’s tomb. It consists of a large natural boulder that was dug out of the ground. The inscription on the front was made by Jeong Gu (1543-1620), who had studied with Kim Seong-il as a student of Yi Hwang.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성일(1538-1593)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34년에 세운 신도비와 김성일의 묘임을 밝히기 위해 1619년에 세운 묘방석이다.
김성일은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황(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지만, 2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다.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비문이 새겨진 몸돌, 용과 구름 문양이 새겨진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문신 정경세(1563-1633)가 짓고, 서예가인 이산해(1539-1609)가 글씨를 썼다. 앞면 맨 위에 새겨진 비의 이름은 문신 김상용(1561-1637)이 썼다. 비각은 1664년에 세워졌다.
묘방석은 김성일의 묘 오른쪽에 있다. 무덤을 조성할 때 땅에서 파낸 큰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앞면에는 이황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정구(1543-1620)의 글이 새겨져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학봉_신도비 | Object | 학봉_신도비 | |
학봉_묘방석 | Object | 학봉_묘방석 | |
김성일 | Actor | 김성일(金誠一,_1538-1593) | |
이황 | Actor | 이황(李滉,_1501-1570) | |
임진왜란 | Event | 임진왜란(1592) | |
정경세 | Actor | 정경세(鄭經世,_1563-1633) | |
이산해 | Actor | 이산해(李山海,_1539-1609) | |
김상용 | Actor | 김상용(金尙容,_1561-1637) | |
정구 | Actor | 정구(鄭逑,_1543-1620) | |
이준 | Actor | 이준(李埈,_1560-1635)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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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_신도비 | 김성일 | isSteleOf |
학봉_묘방석 | 김성일 | isSteleOf |
학봉_신도비 | 정경세 | writer |
학봉_신도비 | 이산해 | calligrapher |
학봉_신도비 | 김상용 | calligrapher |
이황 | 김성일 | hasDisciple |
학봉_묘방석 | 정구 | writer |
학봉_묘방석 | 이준 | writer |
김성일 | 임진왜란 | isRelatedTo |
참고자료
-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81 →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신도비와 묘소 바로 옆에 위치한 묘방석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며, 묘방석은 묘의 바로 옆에 두어 묘의 주인공을 밝혀두는 것이다. [위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김성일의 묘에서 약 50m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신과 이수를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세워놓았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새겨놓았다. 1634년(인조 12)에 세운 비로서, 정경세(鄭經世)가 비문을 짓고, 이산해(李山海)가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진 비의 전액(篆額)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증이조참판학봉김선생신도비명(贈吏曹參判鶴峰金先生神道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비신 규격은 높이 213㎝, 너비 108㎝, 두께 37㎝이다. 묘방석은 1619(광해군 11)에 건립되었는데, 비보다 앞서 묘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조선학봉김선생사순지묘(有明朝鮮鶴峰金先生士純之墓)’라 새겨져 있다. 규격은 높이 155㎝, 너비 175㎝, 폭 130㎝, 둘레 500㎝로 되어 있다.
- 학봉선생 기념사업회, http://hakbong.org/hb/?mid=page23 → 선생의 묘소(墓所)는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무은산(茂隱山) 선영하에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각은 묘소 아래 3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종(顯宗) 5년(1664)에 세웠다. 귀부(龜趺)는 화강암을 거북모양으로 조각하였고, 비신(碑身)도 역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신의 높이는 213cm, 넓이 108cm, 두께 37cm 이며 이수(?首)의 높이는 80cm로 용무늬와 구름무늬를 새겼다. 비신과 이수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 이 묘방석은 학봉선생 묘소 옆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이다. 묘방석의 크기는 높이 155cm, 넓이 175cm, 두께 130cm이다. 바위 전면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고, 바위 후면에는 창석(蒼石) 이준(李埈) 선생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⑦] 경북-불의를 거부하고 원칙을 중요시한 김성일(2), 뉴스퀘스트, 2019.10.12.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218 → 전란 중이라서 지리산 기슭에 임시로 매장을 했다가 그해 12월 경북 안동의 와룡면 서지동으로 옮겨서 안장을 했다. 시신을 모시려고 구덩이를 파는데 북처럼 생긴 커다란 돌이 나왔다. 퇴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 했던 정구가 쓴 글을 그 돌에 새겨서 김성일의 묘방석으로 삼았다.
- [안동 의성김씨 서지재사] 항목 참조 → 김성일 재사 / 김성일은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황(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지만, 2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다.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 영남학파의 거두인 학봉 김성일의 묘, 묘방석과 신도비를 주목하자!, 마카다 안동(안동시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2018.10.12. https://blog.naver.com/andongcity00/221375917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