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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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Iron Seated Buddha of Mangisa Temple, Pyeongtaek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영문명칭 Iron Seated Buddha of Mangisa Temple, Pyeongtaek
한자 平澤 萬奇寺 鐵造如來坐像
주소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진위로 181-82(동천리)
지정(등록) 종목 보물 제567호
지정(등록)일 1972년 7월 22일
분류 유물/불교조각/금속조/불상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구
웹사이트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918~1394) 불상 양식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원래 따로 주조된 오른팔과 양손은 절내에 따로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의 팔과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불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고,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불신의 높이 142.5cm, 어께폭 58.0cm, 무릎폭 92.0cm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고,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가 남행하던 중 절 경내의 우물을 마시고 감로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현재의 감로천 수각은 2009년 신축하였다.


  • 육계(肉髻) : 원래 인도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올려 묶던 상투에서 유래했으며, 부처의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함.
  • 삼도(三道) : 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 줄기 주름

국문 수정안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나타낸 것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불상은 철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두껍게 금칠되어 있다. 이와 같은 철불은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유행하였다. 당시에 철은 값비싼 금동과 달리 생활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으며, 철불은 주로 지방 호족이나 평민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불상의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금의 양 손과 오른팔은 모두 새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상 양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영문

This is a statue of Sakyamuni, the Buddha, which is presumed to have been made in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is made of iron, the surface of which is thickly coated with gold. The right hand of the Buddha reaches down toward the ground, indicating the attainment of spiritual enlightenment. The right arm and both hands are newly made, and the originals are preserved separately inside the temple. The folds of the robe are formulaic, replicating the standard style of the time.

Iron buddha statues became popular in the early Goryeo period. Iron was easy to obtain in comparison to expensive gold and bronze, and with the rise of Buddhism, many iron buddha statues were made by local gentry and commoners.

참고

철불

  • 최성은, 『철불』, 대원사, 2014.

철불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무렵부터이며 고려 초기에는 크게 유행하였다. 불교의 예배 존상을 금동과 같은 값비싼 재료로 만들지 않고 농기구나 무기의 재료이던 철을 이용한 것은, 철불을 만들어 모시고자 한 사람들이 중앙의 귀족이나 상류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지방 호족이거나 평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활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철로 불상을 만들어 모셨는데, 이런 점에서 철불은 불교가 대중화됨에 따라 예배 존상이 서민화된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려시대에는 왕실 발원의 불상들도 철로 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왕조가 바뀌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래 내려온 철불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졌고, 통일신라시대의 주요 지방 호족들이 고려의 중앙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되면서 그들이 친근감을 갖고 있던 철불을 보다 큰 규모로 조성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수요가 줄게 되고, 이전의 금동불이 다시 선호되면서 철불 조성은 드물게 되었다. (8-9쪽)

우리나라에서 철불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통일신라 하대부터이다. 이 시기는 절대 왕권이 쇠퇴하고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으로 중앙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는 반면 지방 호족 세력이 대두하던 때였다. 지방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대가람을 창건하여 중국에서 돌아온 선사들을 모셔서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으며, 지방에서도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주조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다. 현재 전하는 통일신라 철불의 대부분이 선종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29쪽)

감로천

만기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이 책의 불우佛宇조에 ‘만기사가 무봉산舞鳳山에 있다’라고 간단히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1843년 편찬된 『진위읍지』에는 “절 북쪽에 있는 돌구멍에서 맑은 샘물이 나오는데 맛이 아주 달고 차가웠다. 옛날 세조가 이 절에 수레를 멈추어놓고 우물에 나가 물을 마셔보고 ‘맛이 단 샘물이니 감로천甘露泉이라고 하라’고 해 사람들이 어정御井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후 1843년 편찬된 『진위읍지』에도 ‘만기사가 무봉산 아래에 있다’고 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1899년에 편찬된 『진위읍지』에도 여전히 “현 북쪽 5리 무봉산 남쪽 산기슭에 있다”고 했다. 이 같은 기록들은 20세기 초까지도 만기사의 사세寺勢가 유지됐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