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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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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노산성
평창 노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평창노산성
한자 平昌魯山城
주소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평창중앙로 158-8, 및 중리 산10 일원 (하리)
지정(등록) 종목 강원도 기념물 제80호
지정(등록)일 2003년 1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관리자 평창군
수량/면적 1곽(51,357㎡)
웹사이트 평창 노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곳은 조선조(朝鮮朝) 중기 흉폭한 왜적(倭賊)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조상들이 피 흘려 싸운 곳이다. 이 곳에 처음 성을 쌓은 것은 조선 중기라 하나 성을 쌓은 모양으로 보아 그보다 더 오래인 고려시대 이전에 이 고장을 지키려는 선민들이 쌓은 산성이라고 보는 편이 옳은 것 같다. 특히 이 곳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공이 이 산성을 수축하고 전란에 대비한 바 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관민이 함께 피난했던 응암굴이 있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400여미터의 작은 산성이나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수축한 산성이다. 이 고장을 지켜온 호국의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자 표석을 세워 옛 일을 후세에 전한다.

수정 국문

초고

평창 노산성(平昌魯山城)은 노성산(魯城山)에 있는 산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는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초에 김광복(金光福, 1529~?)이 일시적으로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수인 권두문(權斗文, 1543~1617) 등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왜군과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노산성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절벽이거나 매우 가파른 곳이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성벽은 북쪽의 절벽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현재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성내의 시설로는 산 정상 부근에 깊이 약 2m의 우물터 한 곳이 있다.

현재 산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한 “임진노성 전적비(壬辰魯城 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 문화재청, 민백에는 노산성의 축조시기를 조선 선조 초 김광복에 의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본문 내용에도 이미 그 전에 축조된 것으로 나오고 출토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고 하여 앞뒤 내용이 모순된다. 지표조사보고서와 “지역N문화” 사이트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축조된 산성인데, 조선시대 선조 초 김광복이 수리, 축조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문화재청, 민백의 기사 내용도 앞뒤가 맞게 된다.

1차 수정

노산성은 노성산(해발 419m) 정상을 둘러싼 산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선조(1567~1608 재위) 초의 무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김광복(金光福, 1529~?)이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수인 권두문(權斗文, 1543~1617) 등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왜군과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노산성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절벽이거나 매우 가파른 곳이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현재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성내의 시설로는 산 정상 부근에 깊이 약 2m의 우물터 한 곳이 있다.

현재 산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한 임진노성 전적비(壬辰魯城 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하고 3면으로 축조되었는데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노산성은 평창의 진산(鎭山)인 노성산(해발 419m) 정상을 둘러싼 둘레 571m의 석축 산성이다.
      노산성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절벽이거나 매우 가파른 곳이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 축조되었는데 능선 바로 아래 지점을 따라 장방형의 돌로 품(品)자형 쌓기 하였다. 성내의 시설로는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건물지와 산 정상 부근에 동서 7.7m, 남북 8.5m, 깊이 약 2m 규모의 추정 집수지 한 곳이 있다. 성 내에서는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도기·백자편 등이 확인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전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석축으로 둘레 1,364척, 높이 4척으로 안에 우물이 1개소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1567~1608 재위) 초의 무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김광복(金光福, 1529~?)이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수인 권두문(權斗文, 1543~1617) 등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왜군과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현재 산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한 임진노성 전적비(壬辰魯城 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노산성은 노성산(해발 419m) 정상을 둘러싼 산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선조(1567~1608 재위) 초의 무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김광복(金光福, 1529~?)이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수인 권두문(權斗文, 1543~1617) 등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왜군과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관민이 함께 피난했던 응암굴이 있다.
      노산성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절벽이거나 매우 가파른 곳이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현재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성내의 시설로는 산 정상 부근에 깊이 약 2m의 우물터 한 곳이 있다.
      현재 산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한 임진노성 전적비(壬辰魯城 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2차 수정

노산성은 평창의 진산(鎭山)인 노성산(해발 419m) 정상을 둘러싼 산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선조(1567~1608 재위) 초의 무신이자 의병장이었던 김광복(金光福, 1529~?)이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수인 권두문(權斗文, 1543~1617) 등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왜군과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관민이 함께 피난했던 응암굴이 있다.

노산성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절벽이거나 매우 가파른 곳이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하고 3면으로 축조되었는데 현재 대부분 붕괴되어 있다. 성내의 시설로는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건물지와 산 정상 부근에 동서 7.7m, 남북 8.5m, 깊이 약 2m 규모의 추정 집수지 한 곳이 있다. 성 주변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와 조각과 토기·도기·백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산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한 임진노성 전적비(壬辰魯城 戰績碑)가 세워져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