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효자 오백주 정문
2020 국문
초고
조선 숙종 때 효자 오백주(吳伯株:1643~1720)의 효행을 기린 정문이다. 정문은 열녀와 충신, 효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집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을 뜻한다. 선생은 인조 21년(1643) 어룡동에서 출생하여 23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구성도호부사를 지내면서 청념하다는 평을 들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돌로 제단을 쌓아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고 산삼과 꿀을 구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여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아버지 병을 낫게 하고자 쌓았던 제단이 축석령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1954년 중수를 했고 1993년 원래의 위치에 사당과 정각을 건립하였다. 정문 안의 오른쪽 상단에는 지금 왕 원년 신축에 건립[上之元年辛丑立]했다는 현액이 걸려 있어 1721(경종 1)에 정려가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증손인 오수진과 부인 인천이씨의 효자 · 열녀 정문 현액이 있고, 왼쪽에는 오몽량의 부인 문화유씨의 열녀 정문이 있다.
수정
조선 숙종 때 효자 오백주(吳伯株:1643~1720)의 효행을 국가에서 기리기 위해 내린 정문이다. 정문은 열녀와 충신, 효자의 집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이다.
오백주는 인조 21년(1643) 어룡동에서 출생하였으며, 23세에 무과 급제 후 구성도호부사를 지내면서 청렴하다는 평을 들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였고 산삼과 꿀을 구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이때 바위에 축원을 드렸던 고개를 축석령(祝石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행을 국가에서 높이 인정하여 효행자로 선정하고, 경종 3년(1723)에 정문을 내렸다.
그 후 동네 입구로 옮기고 나서 훼손되었던 것을 @@@@년*에 중수하고, 1993년 원래의 위치로 옮기면서 사당과 정려각도 건립하였다. 정려각 내부 한가운데에 오백주의 정문이 있다. 오른쪽에는 증손 오수진(吳壽晋)과 부인 인천이씨의 효자 · 열녀 정문이 있고, 왼쪽에는 증조 오몽량(吳夢亮)의 부인 문화유씨의 열녀 정문이 있다.
- 원래 안내판에는 1954년 중수했다고 나오고, 향토문화대전에는 1961년에 중수했다고 나옴. 중수시기에 대해 확인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