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풍천노씨 대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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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풍천노씨 대종가는 세조 때의 청백리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 1403~1463)선생께서 경남 창원에서 처가(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모집 사위)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사를 오면서 지은 집으로 70여 년 전에 재목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여 중수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남부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으로서 사대부집답게 “口”자형으로 배치가 되었고, 곡간은 초가였으나 기와로 보충하였다.

선생은 풍천노씨로서는 처음으로 함양에 들어와 살게 된 증시조이며 세종 때 벼슬을 시작한 이후 중국의 주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역사 등 국가의 흥망성쇠와 군사, 교육, 외환 등 윤리와 도덕에 바탕을 둔 사실들을 엮은 “치평요람”을 지어 왕에게 올렸으며 고려사 저술에 참여하였다.

호조예서참판 등 수많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아 세조 때 청백리로 녹선(祿)되었고 상호군으로 보하여졌으며 1701년 숙종 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재향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풍천노씨 대종가는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 1403~1463)이 경상남도 창원에서 처가인 개평마을에 이거하여 건립한 가옥이다. 하동정씨 정여창의 조부인 정복주(鄭復周, 1367~?)는 노숙동의 처외조부가 되고, 경주김씨 김점(金點)이 노숙동의 처부이다. 하동정씨 일가가 먼저 개평마을에 이거하였고 이후 김점이 정복주의 사위가 되어 개평마을에 정착하였다.

노숙동은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치평요람(治平要覧)』, 『고려사』 등 사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풍천노씨의 본관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며, 이들은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노수(盧穗)를 시조로 하고 노숙동을 입향조로 하여 세거하고 있다.

현재 가옥의 안채는 종도리 하부에 ‘孔誕二三七六年’이라고 쓰여있는 기록을 통해 순조 24년(1824)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1985년에 중수되었고 대문채도 멸실된 것을 복원하였다.

1차 수정

이곳은 풍천노씨 가문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풍천노씨의 본관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며, 시조인 노수(盧穗)는 당나라 사람으로 아홉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함양 지역에 풍천노씨가 대대로 살게 된 것은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 1403~1463)이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에서 처가인 이곳 개평마을로 이주한 이후부터이다.

노숙동은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치평요람(治平要覧)』, 『고려사(高麗史)』 등 여러 사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재위 1455~1468) 때에는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며, 숙종 27년(1701) 함양 도곡서원에 모셔졌다.

집은 대문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사랑채 영역과, 안채, 곳간채, 아래채로 이루어진 안채 영역으로 구분된다. 두 영역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 있다. 안채의 뒤에는 별도의 출입문과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현재의 안채는 순조 24년(1824)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85년에 중수되었으며, 대문채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사랑채에는 유리문을 사용하여 현대 한옥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안채의 뒤에는 별도의 출입문과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현재 안채의 종도리에는 공탄(孔誕) 2376(二三七六)년으로 적혀있어 순조 24년(182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1985년에 중수되었으며, 대문채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사랑채에는 유리문을 사용하여 현대 한옥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이곳은 풍천노씨 가문의 종손들이 대대로 사는 집이다. 풍천노씨의 본관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며, 시조인 노수(盧穗)는 당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이후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 1403~1463)이 정여창 선생의 집안의 사위가 되어 경상남도 창원에서 처가인 이곳 개평마을로 이주하였다.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중국의 주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엮은 “치평요람”을 지어 왕에게 올렸으며 고려사 등의 사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호조예서참판 등 수많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아 세조 때 청백리가 되고 상호군이 되었으며 1701년 숙종 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모셔졌다.
      집은 대문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사랑채 영역과, 안채, 곳간채, 아래채로 이루어진 안채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안채 뒤에는 별도의 출입문과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현재의 안채는 순조 24년(1824)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85년에 중수되었으며, 대문채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사랑채에는 유리문을 사용하여 현대 한옥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2차 수정

이곳은 풍천노씨 가문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풍천노씨의 본관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며, 시조인 노수(盧穗)는 당나라 사람으로 아홉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함양 지역에 풍천노씨가 살게 된 것은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 1403~1463)이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에서 처가인 이곳 개평마을로 이주한 이후부터이다.

노숙동은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왕명에 따라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역대 사적 중 정치에 귀감이 될만한 사실들을 뽑아 엮은 『치평요람(治平要覧)』을 편찬하였고, 『고려사(高麗史)』 집필에도 참여하였다. 세조(재위 1455~1468) 때에는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며, 숙종 27년(1701) 함양 도곡서원에 모셔졌다.

집은 대문채, 사랑채로 이루어진 사랑채 영역과 안채, 곳간채, 아래채로 이루어진 안채 영역으로 구분된다. 두 영역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안채 뒤에는 별도의 출입문과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현재의 안채는 순조 24년(1824)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85년에 중수되었으며, 대문채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사랑채에는 유리문을 사용하여 현대 한옥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