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청계서원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서원은 1907년에 청계정사가 있던 터에 세워진 것으로, 탁영 김일손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희생되었다. 그가 이곳 청계정사에서 한 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그 뒤쪽 높은 지대 위에 묘우인 청계사가 있고, 강당 앞으로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경내에는 탁영 김선생유허비와 네모난 연못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15년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김일손의 본관은 김해, 호는 탁영(濯纓)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춘추관과 언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활동하였다. 김일손은 1495년(연산군 1)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세웠으며, 1498년 단종을 애도하는 글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수록하는 일이 발단이 되어 처형되었다.(무오사화)
1915년 지역 유림들이 청계정사가 있었던 자리에 서원을 중건했다. 청계서원은 강당과 동·서재를 앞에 두고, 제향공간인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서원양식을 따르고 있다.
1차 수정
청계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15년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김일손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사림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1486년 과거에 급제하여 주로 춘추관과 언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활동하였다. 1498년 단종을 애도하는 글을 실록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청계서원이 자리한 곳은 원래 김일손이 생전에 청계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1915년 지역 유림들이 청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서원을 중건했다. 청계서원은 강당과 동·서재를 앞에 두고, 제향공간인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서원양식을 따르고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1498년 단종을 애도하는 글을 실록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 때 → 1498년, 단종을 애도하는 김종직의 글을 그가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
- 수정이유: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것이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문제가 된 것임. 또 원래의 문장대로라면 1498년의 사건과 무오사화는 별개 사건처럼 읽힘.
- 1498년 단종을 애도하는 글을 실록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 때 → 1498년, 단종을 애도하는 김종직의 글을 그가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
- 분야별 자문위원 2
- 설립 시기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 보임→수정안에서는 1915년으로 기술하였으나, 함양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1921년에 준공된 것으로 기술됨. 그리고 앞서 “기존 문안”에는 또 1907년으로 기술됨. 확인이 필요해 보임
- “김일손은 ~ 처형되었다”→“김일손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이다. 1486년 과거에 급제하여 주로 춘추관과 언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활동하였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자료로 제출한 사초(史草)에 기록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시가 단종을 애5하고 세조를 비난했다고 하여 무오사화가 발생, 처형되었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청계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15년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김일손은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사림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1486년 과거에 급제하여 주로 춘추관과 언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활동하였다.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여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일손은 처형되었다.
청계서원이 자리한 곳은 원래 김일손이 생전에 청계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1915년 지역 유림들이 청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서원을 중건했다. 청계서원은 강당과 동·서재를 앞에 두고, 제향공간인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서원양식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