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우명리 정씨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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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곳은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선생의 후손이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선생의 7대 손 희운(凞運)이 효리마을에 정착한 것은 조선 경종년간이며, 그 아들 조헌(祖獻)이 분가하여 현재 이 고택이 있는 곳에 처음 초가 4칸을 세웠다. 이후 희운의 4대 손 환식(煥植)이 1895년 무렵에 안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증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일두 선생은 성리학의 종사(宗師)로 받들어지는 조선전기 대표적인 명유이며, 희운가의 형제들도 영조대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종군하여 충절을 다함으로써 관직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동편을 돌아 안채에 출입하게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에는 전통적인 남녀의 생활상의 공간분화가 추구되고 있으며,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구분되고 안채의 부엌은 서편에 두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대문채가 우뚝한 것에 비하여 사랑채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뒤편 가묘는 유교 전통에 충실했던 가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우명리(牛鳴里)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7대손 정희운(鄭凞運)이 경종 연간[1720~1724]에 입향한 후 후손들이 세거한 곳으로 본 가옥은 정희운이 정착한 이후 경종 3년(1723)에 정희운의 아들 정지헌(鄭志獻)이 분가하여 건립한 것이다. 정환식(鄭煥植)이 1895년 안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등을 증축하였다. 사당은 안채의 동쪽 담장 밖에 있으며 안채는 담과 기타 건물들에 둘러싸여 내외가 분명한 조선시대의 가옥 형태를 나타낸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 ?~1728)가 난을 일으키자 정희량(鄭希亮, ?~1728)이 합세하였는데 정희운의 아들 중헌(重獻), 사헌(師獻), 상헌(相獻)과 재종간 일가 9명 등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관직에 추증되었다.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구충각(九忠閣)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1차 수정

이 집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8세손 정지헌(鄭志獻)이 처음 건립하였다. 이 집이 위치한 우명리 효리마을은 정지헌의 아버지인 정희운(鄭凞運)이 경종(재위 1720~1724) 때에 입향한 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

정지헌은 본래 초가집을 지었으나, 이후 후손인 정환식(鄭煥植)이 1895년 안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등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채는 담장과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고 사당은 안채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구분하고 생활공간과 제향공간을 분리한 조선시대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집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는 정희운을 비롯한 하동정씨 일가 아홉 사람의 정려를 모신 구충각(九忠閣)이 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 ?~1728)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함양 지역에서는 정희량(鄭希亮, ?~1728)이 병사를 일으켜 이인좌에 합세하였다. 이때 정희운의 아들 중헌(重獻), 사헌(師獻), 상헌(相獻)과 육촌 형제 등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관직에 추증되었으며,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이 집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8대손 정지헌(鄭志獻)이 처음 건립하였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이 곳 효리 마을은 성리학의 종사(宗師)로 받들어지는 조선전기 대학자인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7대손 희운(凞運)이 경종(재위 1720~1724) 때에 입향한 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산 곳이다. 그 아들 8세손 정지헌(鄭志獻)이 분가하며 처음에는 초가집을 지었으나, 이후 그의 3대손인 환식(煥植)이 1895년에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채는 담장과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고 사당은 안채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구분하고 생활공간과 제향공간을 분리한 조선시대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동편을 돌아 담장과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인 안채에 출입하게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에는 남녀의 생활상의 공간이 나눠져 있으며,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구분되고 안채의 부엌은 서편에 두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등 생활공간과 뒤편 가묘 등의 제향공간을 분리하였다. 대문채가 우뚝한 것에 비하여 사랑채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집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는 정희운을 비롯한 하동정씨 일가 아홉 사람의 정려를 모신 구충각(九忠閣)이 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 ?~1728)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함양 지역에서는 정희량(鄭希亮, ?~1728)이 병사를 일으켜 이인좌에 합세하였다. 이때 정희운의 아들 중헌(重獻), 사헌(師獻), 상헌(相獻)과 육촌 형제 등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관직에 추증되었다.

2차 수정

우명리 정씨고가는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8대손 정지헌(鄭志獻)이 처음 건립하였다. 이 집이 위치한 효리마을은 정지헌의 아버지인 정희운(鄭凞運)이 경종(재위 1720~1724) 때에 입향한 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산 곳이다.

정지헌은 본래 초가집을 지었으나, 이후 그의 3대손인 정환식(鄭煥植)이 1895년에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앞쪽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안채가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사이 안마당의 양옆에는 아래채와 곳간채가 있다. 안채는 담장과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고 사당은 안채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구분하고 생활공간과 제향공간을 분리한 조선시대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집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는 정희운을 비롯한 하동정씨 일가 아홉 사람의 정려를 모신 구충각(九忠閣)이 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 ?~1728)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함양 지역에서는 정희량(鄭希亮, ?~1728)이 병사를 일으켜 이인좌에 합세하였다. 이때 정희운의 아들 중헌(重獻), 사헌(師獻), 상헌(相獻)과 육촌 형제 등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관직에 추증되었으며,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