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안국암 승탑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안국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403년(태종 3)에 행호조사(行乎祖師, 생몰 연대 미상)가 중건하였다. 이 절의 경내에는 모두 4기의 부도가 있는데, 2기는 행호조사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것이고, 다른 2기는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라 전한다. 높이는 1.4~1.5m 정도로 거의 일정하다. 이 중 하나인 8각형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8각 부도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시대의 것으로 비교적 안정감이 있고 단정한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지붕돌(屋蓋石) 위쪽에는 꼭대기 부분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호조사는 고려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닫고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불교가 강하게 배척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세종의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안국암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2기는 1403년에 안국암을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고, 다른 2기는 각각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모셨다.
4기의 승탑 중 가운데에 있는 팔각형의 행호조사 승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행호조사는 고려시대의 명재상인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으로, 태종(1400~1418 재위)과 세종(1418~1450 재위)의 신임을 얻었으며 지리산 부근의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전란과 억불정책으로 쇠락해진 사찰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세종의 형 효령대군(1396~1486)은 행호를 특히 공경하여 그를 ‘진불(眞佛)’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승탑는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 ‘~사리를 모셔놓은 조형물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탑과 같은 의미에서 승탑이라고도 한다.’
-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 ‘~ 글로 지어 새겼다.’
- 2번째 문단의 당호는 모두 구정에 따른 추정임. 구전이라는 점 명식 필요
- 승탑의 특징과 문화재적 가치 추가 필요
- 분야별 자문위원 2
-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승탑은 부처나 덕망 높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일종의 무덤이다. 다르게는 부도로 부른다. 승탑과 함께 탑비를 세우는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 안국암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2기는 1403년에 안국암을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고, 다른 2기는 각각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모셨다. →안국사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승탑에 새겨진 답호로 보아 안국사를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와 금송당(琴松堂) 및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형태는 기단부가 팔각이며, 지붕 갖춘 몸돌의 팔각원당형과 종모양의 석종형으로 나누어진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부도와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다. → ‘승탑’의 정의를 굳이 문화재 안내판에 명기할 필요가 있을까? 필요하다면 안내판 아래쪽에 주석과 같이 부연설명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함.
- 안국암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2기는 1403년에 안국암을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고, 다른 2기는 각각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모셨다. → 문단 첫 머리에 이 승탑이 안국암에 있는 승탑 4기 중 하나라는 것을 먼저 전제할 필요가 있음. 승탑 4기에 모두 당호가 없으므로, 승탑 중 2기가 행호조사의 것, 다른 2기가 금송당과 서상대사의 것이라 ‘전함’을 명시해야 함.
- 4기의 승탑 중 가운데에 있는 팔각형의 행호조사 승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행호조사탑’이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음. 주어가 항상 ‘이 승탑’이어야 하며, ‘이 승탑’의 형태 특징을 부각하여 다른 승탑과 차별화 할 필요가 있음. 즉, ‘이 승탑은 함께 전하는 다른 승탑과는 달리 탑신석이 석종형이 아닌 팔각형이다.’ 등 형태상 차별화된 특징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승탑만이 지정문화재임을 구별할 수 있도록 기술 필요.
- 승탑의 기본적인 특징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 승탑 기본 정보 객관적으로 서술 필요(높이, 크기, 형태, 세부 특징 등)
- 행호조사의 생애를 간략히 서술한 점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됨. 행호조사는 조선전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므로, 이 탑이 행호조사탑이 맞다면 그 제작시기는 그가 입적한 15세기로 볼 수 있음.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 승탑은 함께 있는 다른 승탑보다 제작시기가 훨씬 앞선 조선전기, 혹은 고려후기까지 소급해 볼 수 있음. 한편 문화재청 문화재정보에는 고려시대 승탑으로 편년하였으므로, 다각도로 검토하여 정확한 편년을 제시할 필요가 있음.
2차 수정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덕망 높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제자와 신도들이 스님을 기려 승탑과 탑비를 세웠으며, 탑비에는 스님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안국암에는 4기의 승탑이 있는데, 2기는 1403년에 안국암을 중건한 행호조사(行乎祖師)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고, 다른 2기는 각각 금송당(琴松堂)과 서상대사(西上大師)의 사리를 모셨다고 전해진다.
4기의 승탑 중 가운데에 있는 팔각형의 행호조사 승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행호조사는 고려시대의 명재상인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으로, 태종(1400~1418 재위)과 세종(1418~1450 재위)의 신임을 얻었으며 지리산 부근의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전란과 억불정책으로 쇠락해진 사찰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세종의 형 효령대군(1396~1486)은 행호를 특히 공경하여 그를 ‘진불(眞佛)’이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