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백용성선사 화과원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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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곳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선사(禪師)가 ‘선농일치(先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제창한 곳이다. 전라북도 남원(남원)에서 출생한 선사는 어릴 때 부처로부터 법(法)을 받는 꿈을 꾼 뒤,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極樂庵)으로 출가하였다. 선사는 불교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3·1운동 때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3년간의 옥살이를 한 선사는 출옥 후, 서울 대각사(大覺寺)에서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 운동과 국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이곳에 화과원(華果院)을 세우고 선농불교를 전파하였다. 화과원은 사원의 경제 자립을 세우고 스님들 스스로가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선사는 이곳을 거점으로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선사는 76새애 입적(入寂)하였는데, 치아에서 금색 사리(舍利) 1과(果)가 나왔다고 한다. 그의 사리탑은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서 있다. 선사의 법명(法名)은 진종(震鍾)이고 용성(龍城)은 법호(法號)이다. 현재 이곳에는 법당, 선방 등 9기소의 건물 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당시에 심었던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이 아직도 남아있다

수정 국문

초고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농장의 터이다.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이며, 불교에서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였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3·1운동으로 인해 3년간의 옥살이를 한 선사는 출옥 후, 서울 대각사(大覺寺)에서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불교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용성은 이곳의 산림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를 심고 화과원(華果院)이라고 이름한 농장을 건립하였다. 이곳의 산출물로 일제 강점기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역사·문화적 거점의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1991년 정혜원 스님이 부임하면서 관리하였고 2005년에 봉유대를 복원하여 2000년 8월 31일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로 지정받았다.

백용성 선사는 이곳을 거점으로 일제의 통제와 억압을 피하여 산을 넘어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의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화엄경󰡕 등 불교 경전의 한글화 작업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 등에도 힘썼다. 현재 이곳에는 법당, 선방 등 9기소의 건물 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당시에 심었던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의 과일나무가 주변에 다수 남아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 1927년 백운산(해발 1,279m)에 세운 농장인 화과원이 있던 곳이다.

백용성은 고종 16년(1879)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하였고,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섰으며,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불교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화과원은 사원을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하고 스님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할 수 있도록 설립한 농장이다. 백용성은 백운산의 산림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를 심었고, 이곳의 산출물로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역사·문화적 거점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원래 화과원에는 16동의 건물이 있었고 수십명의 승려의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지리산 지역의 공비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전소되었고, 1991년 백용성의 손상좌*인 정혜원(鄭慧圓, 1940~2013)이 부임한 뒤로 복원에 힘써 백용성이 거처하던 봉유대를 2005년 복원하였다. 현재는 법당터와 선방터 등 9개 동의 건물 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최초 설립 당시에 심었던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 손상좌(孫上佐): 제자의 제자.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화과원은 사원을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하고 스님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참선 수행을 위해 설립한 선농일치를 구현한 장소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일제강점기의 승려’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화과원 유허지가 무엇인지부터 소개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이곳은 1927년 일제강점기 백운산 황무지를 일궈 만든 화과원이라는 농장터가 있던 자리다.
    • 3번째 단락의 화과원 설명은 문장을 쉽게, 단문으로 다듬었으면 합니다.
    • 화과원은 승려들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농장이다. 참선과 농사를 함께 하는 ‘선농불교’를 제창했던 백용성 선사는 백운산의 황무지를 개간해 과수를 심었다. 이곳에서 수확한 농작물과 구운 도자기를 판 수익금은 군산항을 통해 중국 상해와 용정에 독립자금으로 보내졌다. 백용성 선사는 화과원을 거점으로 일제의 압박을 피해 뒷산을 넘어 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불교 개혁과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2차 수정

이곳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 1927년 백운산(해발 1,279m)에 세운 화과원이라는 농장이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 때의 승려인 백용성은 고종 16년(1879)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하였고,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섰으며,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불교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참선과 농사를 함께 하는 ‘선농불교’를 제창했던 백용성은 백운산의 산림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를 심었고, 이를 통해 사원을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하고 스님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곳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역사·문화적 거점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원래 화과원에는 16동의 건물이 있었고 수십 명의 승려의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지리산 지역의 공비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전소되었고, 1991년 백용성의 손상좌*인 정혜원(鄭慧圓, 1940~2013)이 부임한 뒤로 복원에 힘써 백용성이 거처하던 봉유대를 2005년 복원하였다. 현재는 법당 터와 선방 터 등 9개 동의 건물 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최초 설립 당시에 심었던 배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 손상좌(孫上佐): 제자의 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