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하남 이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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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사적 제422호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산 36 일대
이성산성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있는 높이 209m의 포곡형(包谷刑) 석축(石築) 산성이다.(면적 160,361㎡ 48,509평). 이 산성은 한강에 접한 여러 성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인 중요성과, 성내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 등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6년부터 2003년까지 10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장방형, 9각, 8각, 12각 등의 건물지와 2개소의 저수지, 신앙유적 등의 유구가 노출되었고, “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戊辰年五月十二日 朋南漢城都使 - 608년으로 추정)”가 기록된 목간(木簡),자(尺),목제인물상, 철제농구와 무기, 벼루를 비롯한 토제품, 토기, 기와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은 두 차례 이상 대규모의 수축을 거친 것으로 생각된다. 성을 처음 쌓은 세력이 백제 또는 고구려라는 학설도 있으나, 현재 드러낸 고고학적인 유물과 성의 구조는 신라에 의해 축성되고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1차 수정
이성산성은 이성산(해발 209.8m)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 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6세기 중반 무렵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후 고려 초기 이전에 기능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성산성의 총 둘레는 1,665m로 삼국시대의 성곽 중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1986년부터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치 1곳, 건물지 11곳, 문지 2곳, 저수지 3곳, 저장구덩이 3곳, 의례유구 4곳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9각, 12각 등 다각형 평면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성벽은 두 차례에 걸쳐 서로 다르게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1차 성벽을 쌓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성이 붕괴되자 1차 성벽에 덧붙여 2차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6~8세기 무렵 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성 안에 있던 저수지에서는 철제 도끼, 쇠스랑, 짚신, 목제인형, 바구니, 팽이 등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다. 나무 조각에 글자를 적은 목간도 다수 발견되어 당시 사회생활이나 신라의 지방지배 체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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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하기 이전 백제와 고구려가 축조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발굴된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6세기 중반 무렵처음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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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별 자문위원 2
- 어려운 한자어는 한자 병기: 포곡식(包谷式)
-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아직도 이성산성을 백제 때 쌓은 도읍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고려한 표현 같으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결과 그러한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생략할 필요가 있겠음
- 이성산성의 역사적인 의미를 마지막 문단으로 추가: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한 후 설치한 신주(新州)의 치소성으로 구축되었으며, 이후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성으로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1)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남쪽은 평야를 둘러싼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나즈막한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2)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6세기 중반 무렵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후 고려 초기 이전에 기능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인 6세기 중반 무렵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성은 신라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후 고려 초기 이전에 산성으로써의 기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2차 수정
이성산성은 이성산(해발 209.8m)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남쪽은 평야를 둘러싼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나지막한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 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인 6세기 중반 무렵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후 고려 초기 이전에 산성으로써의 기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성산성의 총 둘레는 1,665m로 삼국시대의 성곽 중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1986년부터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치 1곳, 건물지 11곳, 문지 2곳, 저수지 3곳, 저장구덩이 3곳, 의례유구 4곳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건물들은 9각, 12각 등 다각형 평면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성벽은 두 차례에 걸쳐 서로 다르게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1차 성벽을 쌓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성이 붕괴되자 1차 성벽에 덧붙여 2차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6~8세기 무렵 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성 안에 있던 저수지에서는 철제 도끼, 쇠스랑, 짚신, 목제인형, 바구니, 팽이 등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다. 나무 조각에 글자를 적은 목간도 다수 발견되어 당시 사회생활이나 신라의 지방지배 체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