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하남 동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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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석탑은 고려 초기의 절토로는 최대 규모인 하남 동사지桐寺址에 삼층 석탑과 나란히 남동향으로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높이 7.5m의 이 석탑은 경기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큰 탑이다. 이 탑의 기단은 여러 장의 사각형 석재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隅柱[우주]과 버팀 기둥撑柱[탱주]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다른 석탑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1층 탑신의 하단은 4장의 방형 석재로, 그리고 상단은 1장의 석재로 만들었는데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서리 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1층부터 3층까지의 지붕돌은 각각 4장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으며 모서리 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1층부터 3층까지의 지붕돌은 각각 4장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으며 4층은 2장, 5층 1장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을 보이고 있다. 상륜에는 노반석露盤石만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정사각형의 탑으로 탑신부의 각 층 비례도 조화를 이루는 등 양식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오층석탑은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초기의 절터 중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동사지(桐寺址)의 금당자리 동쪽에 삼층석탑(보물 제13호)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높이는 7.5m이다.
탑은 2층의 받침돌[기단], 5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의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1층 몸돌을 2단으로 나누어 만든 것이 특이하다. 아래층은 4개의 석재를 결합해 만들고, 위층은 1장의 석재를 올려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으며,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단을 줄여 1층은 5단, 2층부터 4층까지는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의 끝이 위로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기 위한 부재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지붕돌의 받침 단수나 기단의 기둥 개수가 줄어든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탑을 정사각형으로 만들고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한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어 신라의 석탑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동사지 오층석탑은 금당 자리 동쪽에 삼층석탑(보물 제13호)과 나란히 서 있다. 고려시대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7.5m이다.
탑은 2단의 기단, 5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의 모서리와 중앙, 그리고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1층 몸돌이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4개의 네모난 석재를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은 모습이며,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받침의 수를 줄여 1층은 5단, 2층부터 4층까지는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의 끝이 위로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기 위한 부재인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지붕돌의 받침 수가 점차 줄어드는 점이나 기단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지만,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하고 지붕돌의 모서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 등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였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축조물이다. 무덤과 같은 성격으로 신성시 되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탑은 동사(桐寺)의 절터에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3호)과 나란히 서 있다. 원래 춘궁리 오층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곳에서 “광주동사(廣州棟寺)”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동사(桐寺)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탑의 구성은 아래로부터 이층의 받침돌, 5층을 이룬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은 신라석탑과 같은 이층으로 네 모서리에 기둥과 가운데 버팀기둥이 조각되어 있으며, 윗 받침돌은 버팀기둥의 수가 하나 줄었다. 1층 몸돌은 특이하게 총 5개의 네모진 돌로 짜여 있는데 아래는 4개, 그 위에 1개의 큼직한 돌을 얹은 모습이다. 각 층의 지붕돌은 윗면에 1단의 굄을 만들어 몸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신라탑과는 다른 고려적 특징이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수도 1층에서 위로 갈수록 줄어들고, 사용된 석재의 수도 줄었다.
전체적인 탑의 비례와 짜임새가 좋은 수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고려중기(10세기 후반)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축조물이다. 무덤과 같은 성격으로 신성시 되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부처의 유골) 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동사지 오층석탑은 금당 자리 동쪽에 삼층석탑(보물 제13호)과 나란히 서 있다. 높이는 7.5m이다.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청된다.
탑은 2단의 기단과 5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의 모서리와 중앙, 그리고 각 층의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1층 몸돌이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4개의 네모난 석재를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은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받침의 수가 줄어든다. 1층은 5단, 2층부터 4층까지는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처마의 끝은 위로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기 위한 부재인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지붕돌의 받침 수가 점차 줄어드는 점이나 기단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하고 지붕돌의 모서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 등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부처의 유골) 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동사지 오층석탑은 금당 자리 동쪽에 삼층석탑(보물 제13호)과 나란히 서 있다. 높이는 7.5m이다.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청된다.
2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동사지 오층석탑은 금당 자리 동쪽에 삼층석탑(보물 제13호)과 나란히 서 있다. 고려시대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7.5m이다.
탑은 2단의 기단, 5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의 모서리와 중앙, 그리고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은 특이하게 총 5개의 네모진 돌로 짜여 있는데, 4개의 네모난 석재를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은 모습이며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받침의 수를 줄여 1층은 5단, 2층부터 4층까지는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의 끝이 위로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기 위한 부재인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전체적인 탑의 비례와 짜임새가 좋은 수작으로,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하고 지붕돌의 모서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 등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