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하남 동사지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성산(二聖山) 남쪽 고골저수지 옆의 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고려 초기의 대규모 절터이다. 1988년의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 이곳에 있던 절의 명칭과 규모, 건립시기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조사에서 금당 등 네 곳의 건물터가 드러났으며, 금동불상, 각종 기와류, 청동 불기류 및 도자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 ‘동사(桐寺)’ 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동사의 옛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10세기경에 새롭게 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금당 터는 현재의 대웅전 주변에 있는 넓은 평지로 약 2m 높이의 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사각 초석이 줄지어 있는데, 초석 배열로 미루어 볼 때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2층 불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규모는 신라시대 경주 황룡사의 금당에 필적하는 규모이다. 금당의 중앙에는 본존불대좌의 하대석으로 생각되는 팔각형 석재가 남아 있는데, 지름이 5.1m에 달하여 당대 최대 규모인 것으로 판단된다. 금당 터 동편에는 하남 동사지 3층석탑(보물제13호) 과 5층석탑(보물제12호)이 나란히 서 있어 금당이 쌍탑을 마주하고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 종합안내판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이 보이는 분지에 자리한 이곳은 고려 초기에 존재했던 ‘동사(桐寺)’의 옛터이다.
1988년 판교-구리 간 순환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총 4개의 구역에서 금당터를 포함한 건물지들이 확인되었으며, 금동불상, 기와, 도자기, 청동불구류(靑銅佛具類) 등이 출토되었으며, 발견된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1911년에 이미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보물 제332호)이 출토된 바 있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광주동사(廣州桐寺)’ 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이곳이 10세기 무렵 사찰이 존재했던 절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동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점에 지어진 거대한 규모의 사찰로 조선 전기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폐사된 시기나 그 외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금당지 남동쪽에는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이 나란히 서 있어 금당이 쌍탑과 마주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금당지에는 대원사의 법당이 조성되어 있다.
- 출토된 불상은 현존하는 철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1차 수정
- 종합안내판
동사지는 이성산성 남쪽 금암산 기슭에 자리한 절터이다. 절터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일 가능성이 높으며, 조선 전기까지 거대한 규모로 사세가 확장되다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88년 판교-구리간 순환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불상이 놓였던 대좌의 기단부로 추정되는 석재와 금당터를 포함한 여러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와 기와 조각, 저울추, 금동불상, 청동불구류 등이 있다. 특히 ‘동사(桐寺)’와 ‘동사(同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과 10세기경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절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금당 자리 옆에는 2개의 석탑(보물 제12호, 제13호)이 나란히 서 있어 금당이 두 탑과 마주하여 남동향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사지에는 대원사*라는 사찰의 법당이 조성되어 있다.
- 자료에 따라 현재 사찰 명칭이 대원사 또는 다보사로 달리 기술됨. 현재 사찰의 이름이 무엇인지 확인 필요.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현재까지 한성기의 절터가 확인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동사지 일대에 산재된 토기와 기와편이 백제 것인지 제대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음. 따라서 가능성을 제기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바람직함. ‘절터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일 가능성이 높으며’->‘절터 일대에 백제 때 것으로 여겨지는 토기와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어 이곳에 백제 때 절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 분야별 자문위원 2
- “절터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일 가능성이 높으며, 조선 전기까지 거대한 규모로 사세가 확장되다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구절은 단순 추정에 불과하여 기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함.-> “1983년 ‘광주동사(廣州桐寺)’명 와편이 보고되면서 절의 이름이 알려졌으며, 사역은 현재의 춘궁저수지 일대로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 “특히 ‘동사(桐寺)’와 ‘동사(同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과 10세기경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인과 관계가 불명확하므로 명확하게 수정 기술할 필요가 있음.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동사지는 이성산성 남쪽 금암산 기슭에 자리한 절터이다. 절터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산재(여기저기 흩어져)해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처음 세운)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거대한 규모로 사세가 확장되다가 이후 폐사(못쓰게 된 사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88년 판교-구리간 순환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하였다. 그 결과 불상이 놓였던 대좌의 기단부로 추정되는 석재와 금당터를 포함한 여러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와 기와 조각, 저울추, 금동불상, 청동불구류 등이 있다. 특히‘동사(桐寺)’와 ‘동사(同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과 10세기경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절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금당 자리 옆에는 2개의 석탑(보물 제12호, 제13호)이 나란히 서있어 금당이 두 탑과 마주하여 남동향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사지에는 대원사*라는 사찰의 법당이 조성되어 있다.
- 동사지는 이성산성 남쪽 금암산 기슭에 자리한 절터이다. 절터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산재(여기저기 흩어져)해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처음 세운)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2차 수정
동사지는 이성산성 남쪽 금암산 기슭에 자리한 절터이다. 절터 일대에서 백제 때 것으로 여겨지는 토기와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에 백제 때 절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찰은 조선 전기까지 사세가 확장되다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88년 판교-구리간 순환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불상이 놓였던 대좌의 기단부로 추정되는 석재와 금당터를 포함한 여러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와 기와 조각, 저울추, 금동불상, 청동불구류 등이 있다. 특히 ‘동사(桐寺)’와 ‘동사(同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과 10세기경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절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금당 자리 옆에는 2개의 석탑(보물 제12호, 제13호)이 나란히 서 있어 금당이 두 탑과 마주하여 남동향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사지에는 대원사*라는 사찰의 법당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