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충헌공 윤전 사우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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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1575~1637)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윤전은 이괄의 난(1624)때 공주로 피신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의 교육기관)의 필선(弼善)이셨던 선생은 세자빈‧대군‧원손 등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과 대항하다가 절사(節死)하셨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원래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던 사당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사우(祠宇)는 선조(先祖)·선현(先賢)의 신주(神主) 혹은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사당이다.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한 충헌공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1575~1637)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윤전의 사우는 《순조실록》 7년(1807) 3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유생들의 상소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들은 모두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부조를 허락해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부조묘(不祧廟)* 형식으로 건립되었다.
본래 후손들이 살았던 부여군 초촌지역에 건립되었으나 1920년대 초반 윤전의 처 해평윤씨와 아들 윤원거(1601~1672)의 묘가 있는 유평리에 사당과 종가를 마련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새로 옮겨진 것이다.
윤전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 2년(1610)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15년 호조좌랑에 이르렀으나 이위경 등 대북파(大北派)에게 몰려 파면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직하여 경기도도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는 공주에 피신한 인조를 호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빈·대군·원손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1702년(숙종 28)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부조묘 :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고 수정
이 건물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윤전(尹烇, 1575-1637)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윤전은 파평윤씨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161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정쟁으로 인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1624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성 밖으로 피난하는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종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에는 세자빈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고, 강화도의 성이 함락된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사당은 순조 7년(1807)에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부여 초촌 지역에 처음 세워졌으며, 1920년대 초반 그의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와 아들 윤원거(尹元擧, 1601-1672)의 묘가 있는 유평리에 사당과 종가를 마련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건물 정면으로 툇마루를 내었고, 지붕의 측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을 달았다. 주변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 사우는 보통 제사를 모시는 경우도 많은데, 여기에서는 언제 제향을 올리는지 확인 불가능함.
1차 수정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헌공 윤전(忠憲公 尹烇, 1575-163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윤전은 파평윤씨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광해군 2년(161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정쟁으로 인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성 밖으로 피난하는 인조(1623~1649 재위)를 호종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세자빈 일행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고, 강화도의 성이 함락된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윤전 사우는 순조 7년(1807) 그의 후손들이 살던 부여 초촌면 지역에 처음 세웠다가, 1920년대 초반 윤전의 부인 해평윤씨와 아들 윤원거(尹元擧, 1601~1672)의 묘가 있는 유평리로 옮겨왔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피난하는 인조(1623~1649 재위)를 호종(임금의 행차 때에 어가(御駕) 주위에서 임금을 모시는 사람)하였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인조(1623~1649 재위)를 호종(임금님 행차 때 가마 주위에서 임금을 모심-쉬운 내용으로 수정 필요) 하였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헌공 윤전(忠憲公 尹烇, 1575-1637)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이 적힌 나무패)를 모신 사당이다.
윤전은 파평윤씨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광해군 2년(161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정쟁으로 인해 파직(관직에서 물러남)과 복직(물러났던 관직에 다시 돌아와 일함)을 거듭하였다.
-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헌공 윤전(忠憲公 尹烇, 1575-1637)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이 적힌 나무패)를 모신 사당이다.
2차 수정
윤전 사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헌공 윤전(忠憲公 尹烇, 1575-163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윤전은 파평윤씨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광해군 2년(161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정쟁으로 인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성 밖으로 피난하는 인조(1623~1649 재위)를 호종*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세자빈 일행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고, 강화도의 성이 함락된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윤전 사우는 순조 7년(1807) 그의 후손들이 살던 부여 초촌면 지역에 처음 세웠다가, 1920년대 초반 윤전의 부인 해평윤씨와 아들 윤원거(尹元擧, 1601~1672)의 묘가 있는 유평리로 옮겨왔다.
- 호종(扈從): 임금의 행차 때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