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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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하나의 광배 안에 3구의 불상을 함께 조각하였다. 4부분으로 조각나 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좌협시보살상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본존불은 어깨에서 가슴 부분까지 탈락이 심하지만 당당하고 부드러운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무릎을 걸쳐 내린 상현좌 아래에는 삼존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로 각각 사자상이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는데 마멸이 심하고 파손되어 현재는 꼬리부분만 남아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몇 겹의 둥근 무늬를 물결식으로 표현하였고, 둘레에는 10구의 화불이 표현되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얼굴에 마멸은 있지만 입가에 미소가 보이며, 길게 내린 머리카락과 원통형의 체구, 그리고 X자형의 옷무늬 등이 6세기 초의 불상양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광삼존석불로 추측된다.
수정 국문
초고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석조여래삼존상(石造如來三尊像)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본존불, 좌우에 협시보살, 방형의 사자좌를 두터운 환조에 가깝게 조각하였다. 현재 왼쪽의 협시보살은 파손되어 있고 오른쪽의 협시보살도 발목 이하와 대좌 부분은 결실되었다. 여래와 협시보살이 하나의 광배를 배경으로 구성된 삼존형식과 방형의 사자좌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인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은 얼굴 부분이 파손된 상태이나 나머지 부분은 온전하여 양식 고찰이 가능하다. 불신의 양감이 없으며 대의 자락이 두텁고 옆으로 뻗치는 모습이 삼존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수정
삼국시대인 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 점의 불상이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석조여래삼존상은 광배와 본존불, 협시보살, 방형의 사자좌를 하나의 돌에 두텁게 조각하였다. 현재 왼쪽의 협시보살은 파손되어 있고 오른쪽의 협시보살도 발목 이하와 대좌 부분이 결실되었다.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부분이 파손된 상태이나 나머지 부분은 온전하다. 불신의 양감이 없으며 대의 자락이 두텁고 옆으로 뻗치는 모습으로 보아, 삼존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불좌상과 2구의 보살상이 하나의 광배에 새겨진 삼존상과 1구의 불입상이다.
- 석조여래삼존상은 현재 불좌상과 우측 보살상만 있지만, 원래 좌측에도 우측과 비슷한 형태의 보살상이 있었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 중앙의 불좌상은 얼굴과 좌측 일부가 파손되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이며,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을 아래로 내려뜨려 손바닥을 보인 시무외・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불좌상은 연꽃잎 모양의 대형 광배를 갖추었고, 머리에 꼭대기가 뾰족한 형태의 두광(머리 광배)를 두었다. 불상 주변에는 화불이 줄지어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은 대좌는 방형이며, 불좌상의 옷자락이 전면에 늘어져 있다. 방형 대좌 양 옆에는 사자가 한 마리씩 앉아 있다. 우측 협시 보살은 불좌상 광배 옆에 한돌로 새겨져 있으며, 둥근 형태의 두광(머리 광배)를 갖추었다. 보살상이 딛고 선 대좌는 현재 없어졌다.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발(머리카락)을 양 어깨에 늘어뜨렸으며, 아래가 뾰족한 형태의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보살상이 걸친 천의는 하반신에서 ‘X’자 모양으로 교차하고 있다.
- (내용 추가) 이 불상은 하나의 광배에 불상과 보살상 2구를 함께 포함하여 새긴 ‘일광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삼국시대 6세기~7세기 전반에 많이 등장하는 형식이다. 이와 함께 불상의 대의가 두껍고, 대좌 아래까지 늘어져 상현좌를 이루는 점, 대좌 양 옆에 사좌를 배치한 점, 보살상의 천의 형태 등은 특히 삼국시대 불상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6세기 전반 불상의 특징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상 중에서도 이른 시기에 제작된 석상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부분이 파손되었고, 광배와 대좌도 전하지 않는다. 불상은 편평한 석재의 한 면에 새겨졌는데, 함께 있는 삼존상보다 조각 두께가 얕다. 불상의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옷자락과 옷주름은 두껍게 새겨졌다. 왼손을 위로,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보인 시무외・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옷자락을 두껍게 조각한 모양, 아래로 드리운 대의 자락의 옷주름 형태, 수인 등에서 삼국시대 불상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삼존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고대 삼국의 경계지역인 청주에 전해오는 삼국시대 6세기 경에 조성된 상이다.
- 석조여래삼존상은 하나의 돌에 여래와 보살을 높은 부조로 조각하였는데 좌측의 보살상은 없어진 상태이며 오른쪽의 보살상도 대좌이하 부분이 결실되었다. 본존의 옷자락은 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대좌 위로 흘러내려 있으며, 과장된 손 모습 등 백제의 군수리 납석제 불상, 정림사지 출토 납석제 불상 등의 특징과 닮았다. 또한 보살상은 X자형으로 교차되는 옷주름과 좌우로 뻗친 옷자락의 형식이 보인다.
- 삼존상과는 별도의 석조여래입상은 두꺼운 옷을 입어 신체의 굴곡이 없이 드러나지 않고 과장되게 큰 시무외․여원인의 손 모습, 양측으로 뻗친 옷자락의 표현 등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 드러나 삼존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수정
삼국시대인 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삼존상과 석조여래입상이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석조여래삼존상은 하나의 광배에 불상과 보살상 2구를 함께 포함하여 새긴 형식이다. 지금은 가운데의 석조여래상과 오른쪽 보살상만 남아 있다. 본존불은 얼굴과 좌측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오른쪽 협시보살은 발목 이하와 대좌 부분이 결실되었다. 본존불이 앉아 있는 사각형의 대좌는 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고 옷자락이 대좌 아래까지 늘어져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6세기에 만들어진 불상의 특징이다. 보살은 보관을 쓰고 머리카락을 양 어깨에 늘어뜨렸으며, 화려한 구슬로 가슴을 장식하였다.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부분이 파손되었고, 광배와 대좌도 남아있지 않다. 두꺼운 옷을 입어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으며, 왼손을 위로,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보인 모습이나 양쪽으로 뻗친 옷자락의 표현 등은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