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천제암(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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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곳은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기와 제물을 준비하던 재궁(齋宮)이었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마니산 기행’이 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를 지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천제암궁터는 삼단의 석축과 오른편에 우물이 남아있고, 조금 아래에는 이곳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禁標(금표)’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여지도서」 등 옛 문헌에는 ‘천재암(天齋庵)’이나 ‘천재궁(天齋宮)’으로 표기되어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단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3단의 축대가 있고 아래쪽에 네 개의 돌기둥이 서있으며, 축대 꼭대기에는 기왓장 조각들을 모아 놓았다. 단 오른편에는 우물이 남아있다.

이곳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려 말 학자인 이색의 시가 남아있고, 조선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조선 태종 - 이방원. 기사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으로 보임.
  • 연산군 6년(1500)에는 재궁의 전사청(典祀廳)을 고쳐 지을 때, 수군이 직접 양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우 힘들게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 재궁을 나라에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 천제암이 참성단까지 오르지 못하는 경우에 참성단을 대신해 제단의 기능을 했다는 설도 있음.(인천일보, 2011.7.1. 기사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4493)
  • 금표 : 참성단금표. 금표 글자 왼쪽으로 갑자 팔월 입(甲子 八月 立)이라는 글자가 있다. - 참성단과 천제암 모두 ‘제사’와 관련된 곳이었기 때문에 두 곳 모두에 해당하는 ‘금표’ 아니었을지...(개인 추측. 그러나 원 문안에서는 금표가 천제암 진입을 금하기 위한 것으로 읽힐 우려가 있어 초고 작성시 우선 배제함.)

1차 수정

이곳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3단의 축대가 있고 아래쪽에 네 개의 돌기둥이 서 있으며, 축대 꼭대기에는 기왓장 조각들을 모아 놓았다. 오른편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곳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려 말 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가 남아 있고, 조선 태종(1400~1418 재위)이 임금이 되기 전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사 그릇과 제사 물건을 준비하던 곳(재궁, 齋宮)이다.
    •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유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를 목판에 기록한 시판(詩板)과 조선 제3대 임금 태종(1400~1418)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들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 제13대 임금 명종(1545~1567)이 홍문관에 재직 중이던 율곡 이이로 하여금 참성단 제사에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는 기사로 보아, 제사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83년(고종 20)에 폐지되었고, 이곳에 있던 불상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겨졌다.
    • 현재는 삼단의 석축과 넓이 약 70평 정도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금표)와 우물 등이 남아 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다만 고려 말 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가 남아 있고, → 다만 고려 말 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이 이 재궁에서 지은 시가 남아 있고,
      • 수정이유: “이 색의 시”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유적에 대한 사실을 짐작할 수 없음.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이곳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재궁(齋宮)이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유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를 목판에 기록한 시판(詩板)과 조선 태종(1400~1418 재위)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들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궁은 1883년(고종 20)에 폐쇄되었고, 이곳에 있던 불상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겨졌다. 현재는 3단의 축대가 있고 축대 앞에 네 개의 돌기둥이 서 있으며,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금표(禁標)와 우물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