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진도 운림산방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진도 운림산방은 조선말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선생이 말년에 그림을 그렸던 화실로 첨찰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2년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복원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생의 본관은 양천, 자는 마힐, 호는 소치이며 초명(初名)은 허유이다. 20대에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학문을 익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서화를 배워 일세를 풍미(風靡)하는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그의 작품은 강한 느낌을 주는 갈필(마른붓질) 산수가 주를 이루지만, 노송·노매·모란·괴석 등 문인화 또한 일품이다.
선생은 헌종(憲宗)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갈아 왕을 상징하는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는 모란을 그려 바쳤고, 왕실 소장의 고서화(古書畵)를 평(評)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았다. 대표작으로 59세(1866년)에 운림산방을 그린 선면산수도와 스승 김정희의 초상, 묵모란, 파초 등이 있으며, 꿈처럼 지나간 세월을 기록한 몽연록(夢緣錄)이 수록된 소치실록(小痴實錄)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보배섬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의 화맥이 200여년 동안 5대에 걸쳐 9인의 화가를 배출하였고, 선생의 화혼은 후손들을 통하여 지금도 찬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살아있는 미술관”이다.
수정 국문
초고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옆에 위치한다.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은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은 운림각으로 지었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서화예술이 발달한 진도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소치 허련은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로 개명하였다.
허련은 순조 9년(1809)에 진도읍 쌍정리에서 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는데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녹우당의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화첩을 보며 공부를 하였다.
허련은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선면산수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대표작으로 꼽히며 『몽연록』(夢宴錄) 등 『소치실록』을 써서 남겼다.
1차 수정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화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철종 8년(1857)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28세부터 해남 대흥사의 승려 초의(草衣, 1789~1866)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다. 헌종 5년(1839)에는 초의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에게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헌종 12년(1846) 왕에게 그림을 바친 후에는 여러 차례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렸고,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여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허련의 호는 김정희가 지어준 것인데, 원나라 4대 화가 중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을 ‘대치(大痴)’라 하는 데 빗대어 ‘소치’라 하였다고 한다.
1856년 스승인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허련은 고향에 초가를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허련의 문집인 『소치실록(小痴實錄)』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신선들이 산다는 곳처럼 꾸몄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허련의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灐, 1862~1938)과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7~1987) 등 대대로 후손들이 허련의 화풍을 이어갔다.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원형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1982년 허건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운림산방에는 허련이 기거하던 초가를 복원한 건물을 비롯하여 화실과 소치기념관 등이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화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철종 8년(1857)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28세부터 해남 대흥사의 승려 초의(草衣, 1789~1866)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다. 헌종 5년(1839)에는 초의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에게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헌종 12년(1846) 왕에게 그림을 바친 후에는 여러 차례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렸고,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여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허련의 호는 김정희가 지어준 것인데, 원나라 4대 화가 중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을 ‘대치(大痴)’라 하는 데 빗대어 ‘소치’라 하였다고 한다.
1856년 스승인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허련은 고향에 초가를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허련의 문집인 『소치실록(小痴實錄)』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신선들이 산다는 선경(仙境)처럼 꾸몄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허련의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灐, 1862~1938)과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7~1987) 등 대대로 후손들이 허련의 화풍을 이어갔다.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원형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1982년 허건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운림산방에는 허련이 기거하던 초가를 복원한 건물을 비롯하여 화실과 소치기념관 등이 있다.
-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화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철종 8년(1857)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화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1856년 스승인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철종 8년(1857)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尖察山) 기슭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28세부터 해남 대흥사의 승려 초의(草衣, 1789~1866)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다. 헌종 5년(1839)에는 초의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에게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헌종 12년(1846) 왕에게 그림을 바친 후에는 여러 차례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렸고,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여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허련의 문집인 『소치실록(小痴實錄)』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신선들이 산다는 곳처럼 꾸몄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허련의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灐, 1862~1938)과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7~1987) 등 대대로 후손들이 허련의 화풍을 이어갔다.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원형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1982년 허건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운림산방에는 허련이 기거하던 초가를 복원한 건물을 비롯하여 화실과 소치기념관 등이 있다.
-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화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1856년 스승인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철종 8년(1857)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尖察山) 기슭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화가인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철종 8년(1857)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28세부터 해남 대흥사의 승려 초의(草衣, 1789~1866)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다. 헌종 5년(1839)에는 초의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에게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헌종 12년(1846) 왕에게 그림을 바친 후에는 여러 차례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렸고,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여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허련의 호는 김정희가 지어준 것인데, 원나라 4대 화가 중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을 ‘대치(大痴)’라 하는 데 빗대어 ‘소치’라 하였다고 한다.
1856년 스승인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허련은 고향에 초가를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허련의 문집인 『소치실록(小痴實錄)』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신선들이 산다는 곳처럼 꾸몄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허련의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灐, 1862~1938)과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7~1987) 등 대대로 후손들이 허련의 화풍을 이어갔다.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원형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1982년 허건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운림산방에는 허련이 기거하던 초가를 복원한 건물을 비롯하여 화실과 소치기념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