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인흥군 묘 및 신도비
2020 국문
초고
조선 후기 종실 인흥군 이영(李瑛, 1604~1651)의 묘와 신도비이다. 인흥군의 아버지는 선조이고, 어머니는 정빈 민씨이다. 인흥군은 7세에 봉작(封爵)후 받은 이름이다. 그는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겪으며 성장하였다. 이로 인해 늦은 나이인 22세에 여산 송씨(1608~1681)와 혼인하였다. 부인은 여산군부인(礪山郡夫人)에 봉해졌다. 1649년(효종 즉위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묘는 인흥군이 죽은 다음 해인 1652년에 조성하였다. 30년 후에 여산군부인 송씨가 죽자 함께 묻었다. 묘역은 기와지붕을 올린 곡장 안에 인흥군과 여산군부인을 합장한 둥근 봉분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묘갈과 혼유석을, 좌우에 망주석을 두었다. 곡장 아랫단에는 상석·향로석·장명등·양석(洋石) 1쌍 등을 배치하였고, 양관조복(梁冠朝服)의 문인석은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특이하게 상석·혼유석·장명등·망주석 등에 글을 새겨 넣었다.
인흥군의 시호는 처음에는 효숙(孝肅)이었으며, 나중에 정효(靖孝)로 고쳤다. 이로 인하여 두 개의 신도비가 인흥군 묘역 앞에 서 있다. ‘인흥군 효숙공 신도비명(仁興君孝肅公神道碑銘)’이라 쓴 신도비는 1655년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글씨는 인흥군의 아들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가 썼다. 1682년에 시호를 고치면서 신도비를 새로 만들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인흥군과 그의 두 아들은 모두 글씨를 잘 썼다. 특히 낭선군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기로 유명하였다. 17세기 금석문 연구에 도움이 된다.
수정
인흥군 이영(李瑛, 1604~1651)과 부인 여산 송씨의 합장묘 및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새긴 비석을 말한다.
인흥군은 선조(1567∼1608 재위)와 후궁 정빈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조 23년(1645) 종부시·사옹원 도제조를 역임하고, 효종 즉위년(1649)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국방 문제와 척화파 기용에 관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묘역에는 봉분 뒤에 기와지붕의 담장을 둘렀고, 앞에 묘갈과 혼유석·상석·향로석, 좌우에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앞쪽으로 장명등과 석양이 있으며, 문인석은 그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석물의 일부에 글을 새겨 넣은 것이 특징이다.
신도비는 2기가 있는데, 시호가 효숙(孝肅)에서 정효(靖孝)로 바뀐 점이 다르다. 첫 번째 신도비는 효종 6년(1655)에 세웠으며,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비문을 짓고 아들 낭선군 이우(李俁, 1637~1693)가 글씨를 썼다. 두 번째 신도비는 숙종 8년(1682)에 세웠으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비문을 짓고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