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종무장군 묘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장인 이종무(1360-1425) 장군의 묘소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던 장군은 고려 우왕 7년(1381) 20살의 젊은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서 왜구를 격파하고 그 공으로 벼슬자리에 올랐다
조선 태조 6년(1357) 서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첨절제사에 올랐으며, 그 뒤 통원군·의주병마절제사·우군총제 등의 자리에 올랐다. 세종 1년(1419) 왜구의 침입이 더욱 심해지자 조정에서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장군은 전함 227척, 군사 1만 7,0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공략해 항복을 받고 돌아왔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거리가 제일 가까운 일본의 영토로, 이종무에 의해 한때나마 우리나라의 땅이 될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국력을 과시한 일이 되었다. 봉분의 앞면과 좌우면에는 직사각형의 돌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다. 양옆으로는 문인석1쌍이 배열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후대에 새로 세운 묘비가 서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고려 말-조선 초기의 무신인 이종무(李從茂, 1360~1425) 장군의 묘소로, 부인 평양 조씨와 합장한 묘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했다고 전해지며, 1381년(고려 우왕 7) 20살의 젊은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서 왜구를 격파하고 그 공으로 관직에 올랐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역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1400년에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왕자들 간의 권력 다툼인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그의 전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마도 정벌이다. 1419년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돌아왔다.
그의 봉분에는 앞과 양쪽에 직사각형의 병풍돌을 둘렀고, 그 앞에는 2000년대 이후 새로 설치한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다. 묘역의 좌측에 세워진 묘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1975년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1차 수정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무신인 이종무(李從茂, 1360~1425) 장군의 묘소로, 부인 평양조씨와 합장한 묘이다.
이종무는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다고 전해지며, 1381년 20살의 젊은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가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관직에 올랐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역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1400년에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왕자들 간의 권력 다툼인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1419년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봉분 앞의 석물로는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향로석이 있는데, 상석과 향로석은 2000년대 이후에 새로 설치한 것이다. 묘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1975년 묘역 오른쪽에 새 비석을 세웠다.
자문의견
- 사적, 매장 위원1
- 부인 평양조씨와 합장한 묘이다. → 부인 평양조씨가 합장되어 있다.(용어의 중복사용 지양)
- 문화재적 가치 보완 ( 조선전기 무덤양식을 보여 주는 무덤 등)
- 사적, 매장 위원2
- 이종무는 1360년생이다. 그렇다면 1381년 당시 그는 22세이다. 그런데 “1381년 20살의 젊은 나이로”라고 하였다. “1381년 22살의 나이로”, 또는 “1381년 아버지를 따라”로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1400년에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경우 “56 부성사”의 “조선 선조(1567~1608 재위) 때”와 비교할 때 다른 점이 있다. 새롭게 안내문을 정비하는 사업인 만큼 사소한 부분도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겠다. 재위 기간과 생몰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함이 바람직함.
2차 수정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무신인 이종무(李從茂, 1360~1425) 장군의 묘소로, 부인 평양조씨와 합장한 묘이다.
이종무는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다고 전해지며, 1381년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가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관직에 올랐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역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1400년에는 태조 이성계(1392~1398 재위)의 왕자들 간의 권력 다툼인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1419년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봉분 앞의 석물로는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향로석이 있는데, 상석과 향로석은 2000년대 이후에 새로 설치한 것이다. 묘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1975년 묘역 오른쪽에 새 비석을 세웠다.